“인생을 통해 좋은 찬스는 자주 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 찬스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스티비 레이 본은 1954년 10월 3일 텍사스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살 위인 형 지미 본 때문이었다. 평소 블루스 음악에 심취해 있던 지미 본의 기타연주를 보며 그는 형의 밴드에 베이시스트로 가입하였다. 하지만 곧 기타로 바꿔 버디 가이, B.B.킹, 프레디 킹, 지미 리드, 장고 라인하르트, 지미 헨드릭스, 케니 버렐 등을 들으며 자신의 연주세계를 다져갔다.

댈러스의 흑인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다가 고교를 중퇴하고 곧 오스틴으로 가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스티비 레이 본은 더블 트러블(Double Trouble)이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82년 7월부터 정력적인 라이브 활동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데이빗 보위의 히트곡인 'Let’s Dance'에서 알버트 킹 스타일의 기타솔로를 세션해 주어 크게 유명해졌다. 이 곡을 계기로 그는 데이빗 보위의 투어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와 더블 트러블은 83년 6월 [Texas Flood]로 데뷔하는 데, 이 앨범은 예상외로 각종 차트에 오르며 상업적인 성공까지 가져다주었다. 84년 5월에 스티비 레이 본과 더블 트러블은 두 번째 앨범으로 골드 디스크 상을 수상하고 빌보드 차트 3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상복도 꽤 있는 뮤지션인데, 지난 83년에서 8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그래미상을 수상하였다.(그가 받은 부분은 베스트 록 인스트루멘틀, 베스트 블루스 레코딩 등) 이처럼 깊은 음악성 이외에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던 그는 아쉽게도 지난 90년 8월 27일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스티비 레이 본의 연주는 올드팬 뿐만 아니라 지금의 기타 세대에게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는 뮤지션이다. 그의 블루스 연주는 60∼70년대의 전통미와 현대의 세련된 감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 때문에 블루노트 감각에 있어 고전적인 체취가 늘씬 풍기면서도 유려하고 세련된 프레이즈가 막힘이 없이 흘러나온다.

스티비 레이 본은 블루스의 대가답게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창한 블루스 솔로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특히 핑거 폼의 변화가 탁월하다. 블루스 이외에도 웨스 몽고메리 풍의 옥타브 주법에 의한 감칠 맛 나는 연주도 곧잘 들려준다. 'Chitlins Con Carne', 'Riviera Paradise'가 그 예다. 그가 지미 헨드릭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Couldn’t Stand The Weather]와 [The Sky Is Crying] 등에서 각각 'Voodoo Chile', 'Little Wing' 등을 리바이벌하고 있다.

사 용 장 비
◇Fender Stratocaster(59,57,62,64), Gibson ES 335, Fender Telecaster
◇Marshall 4x12 Cabinets, Dumble Head 150, 300W
◇Fuzz Face, Cry Baby(Vox), Ibanez Tube Screamer, Quadraverb

글/조성진



블루스와 록을 접목시키고 거기에 재즈적인 사운드까지 섭렵하여 자신만의 독특하고 열정적인 연주 스타일을 개발한 뮤지션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은 80년대 블루스를 재생시킨 탁월한 재능을 가진 블루스 기타리스트이다.

큰형인 지미 본(Jimmi Vaughan)의 영향으로 11살 때 기타 연주를 시작한 스티브는 고등학교 시절 로컬밴드의 일원으로 일대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했고, 학교를 자퇴한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코브라즈(Cobras)의 일원으로 연주경력을 쌓게 된다.

75년 트리플 쓰렛(Triple Threat)이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한 그는 텍사스 주변의 바와 클럽에서 활동했고, 81년 그룹의 이름을 더블 트러블(Double Trouble)로 바꾸면서 리드 싱어로 자리잡게 된다.

몇 년간의 연주활동을 통해 텍사스 일대의 최고 인기 그룹이 된 이들은 82년 "Montreux Festival"에서 데이빗 보위(David Bowie)와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의 눈에 띄게 되고, 그해 데이빗의 앨범 [Let's Dance]에 스티브가 리드 기타 트랙을 맡게 된다.

이듬해 에픽(Epic)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발표한 [Texas Flood](83)는 블루스와 록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그래미 몇몇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라디오 방송국의 애청곡으로 자리잡으면서 블루스 블록버스터로서의 성공을 누리게 된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두 번째 앨범 [Couldn't Stand the weather](84)를 발표하여 'Tin Pan Alley'를 히트시키며 골드를 기록하는 등 전작에 능가하는 성공을 거둔 밴드는 85년 세 번째 앨범인 [Soul To Soul] 또한 골드를 기록함으로써 더더욱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스티비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독일 공연 중 쓰러져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87년 아내와 이혼하는 불운까지 겪게 되지만 이 모든 문제들을 접고 그는 다시 음악활동에 전념했고, 87년 영화 [Back to the Beach]에 전설적인 로커 딕 데일(Dick Dale)과 열연하는 등 재기에 성공한다.

88년 MTV에서 어쿠스틱 기타 연주 실력을 선보인 그는 제프 백(Jeff Beck)과 함께 공연을 하던 중에 더블 트러블의 다섯 번째 앨범인 [In Step]을 발표해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싱글 'Crossfire'로 AOR(Adult-Oriented Rock) 라디오 부문 정상을 차지했다.

90년 형 지미와 함께 녹음한 [Family Style]로 록 앤 블루스 부문(Rock and Blues Categories)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스티비는 60년대 로커인 조 카커(Joe Cocker)와 2개월간 공동 콘서트를 갖기도 하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한다.

그러나 스티비는 90년 8월 27일 남부 위스콘신에서 에릭 클렙튼(Eric Clapton), 버디 가이(Buddy Guy),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와 공연을 마치고 시카고로 가던 중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극적인 죽음 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91년 형 지미에 의해 앨범으로 발표되지 않았던 이전 스티비의 곡들을 모은 [The Sky is Crying]이 앨범 차트 톱 텐에 오르면서 발매 3개월만에 플래티넘을 기록해 그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비록 그는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음악 속에서 영원히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기타 톤과 테크닉은 스티비 레이 본을 지미 헨드릭스(Jimmi Hendrix) 이래로 최고의 기타 주법을 구사하는 불후의 기타 신으로서 많은 기타리스트들의 추앙을 받게 하고 있다.

                                              - 음악 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