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8월 연포 해변에서 개최된 제1회 TBC(동양방송) 해변 가요제에서 배철수가 이끄는 항공대 출신의 밴드 런웨이(Runway:후에 활주로로 호칭)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라는 곡으로 인기상을 수상했다.

배철수는 이 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라는 곡으로 우수상을 수상한 홍익대 출신의 블랙테트라의 보컬이었던 구창모와 처음 만나게 된다. 이 가요제에서 발표된 위의 두 곡은 1978년도 하반기 가요계의 큰 히트곡이 되었다.

이 두 팀은 이 후 각종 방송 및 대학 축제등의 게스트로 출연하며 바쁜 기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해 10월 활주로는 또 다시 제2회 MBC 대학 가요제에 "탈춤"이라는 곡으로 은상을 수상하면서 이 곡 역시 큰 히트를 하게 된다.

1978년도 가을에 활주로는 지구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이듬해 초 1장의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이 되어 활주로의 멤버였던 김종태(Bass), 박홍일(Keyboard)이 학업을 이유로 활동을 중지하게 되어 이 해 4월 블랙테트라와 함께 정동 문화 체육관에서 고별 라이브를 개최하고 양 팀 모두가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배철수는 블랙테트라의 멤버들과 새로운 팀을 만들어 프로 밴드로 나설 것을 약속하고 많은 시간 연습과 합주를 가졌으나 멤버 구성에 대한 이견을 보여 블랙테트라 쪽에서 포기를 했다.

6월경 배철수는 70년대 초반에 같이 음악 활동을 했던 이봉환(Keyboard)과 항공대 활주로 멤버로 활동하다 입대하여 1979년 4월에 제대한 이응수(Bass)를 영입하고 78 해변가요제 이 후부터 함께 활동했던 지덕엽(Guitar)을 포함한 4명의 멤버로 송골매라는 이름으로 팀을 재정비하고 레코딩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응수는 이전부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탈춤"을 작사했고 그 후에도 송골매의 많은 곡들을 작사 작곡했다.

1979년도 여름을 연습과 녹음으로 보내고 9월에 드디어 송골매 1집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프로모션과 활동에 관해 배철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1970년대 해외의 밴드에 영향을 받아 싱글 위주보다는 앨범 전체를 홍보하는 시스템으로 갔다.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내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활동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1집을 발매한 송골매는 활주로 시절보다는 덜하지만 꾸준히 방송과 공연활동을 하며 1980년을 보낸다.

1981년이 되어 지덕엽(Gt)이 군입대 문제로 음악 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이응수(Bass) 역시 학업으로 돌아가 멤버는 배철수와 이봉환만이 남아 송골매는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배철수는 송골매가 와해된 후 여러가지 방안을 생각하던중 블랙테트라를 떠 올렸다. 당시 블랙테트라는 사분오열 되어 잘 안되던 시기였다. 현재 레코딩 엔지니어로 활동중인 김국현 등이 4막 5장이란 팀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송골매보다 더 안됐고 제작사와의 계약도 파기되고 하던 상황 이었다. 배철수는 구창모와 김정선에게 전화를 하고 그 두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색약수터라는 암자로 이봉환과 같이 찾아 가서 팀을 같이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합의가 되어 배철수(Vocal, Drums), 이봉환(keyboard), 구창모(Vocal, Bass), 김정선(Guitar) 이렇게 4인의 멤버로 클럽 등을 돌며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하면서 2집 레코딩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배철수의 생각에는 뭔가 모자란 부분이 있어 당시 군복무를 하던 오승동(Drums)이라는 친구를 섭외 했고 (오승동은 당시 캠퍼스 출신 밴드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프로의식을 가지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맘을 돌렸다고 한다) 오승동의 친구였던 김상복(Bass)을 영입하여 드디어 6인조의 송골매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활주로와 블랙테트라의 멤버들이 합쳐진 밴드가 송골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후 새롭게 재정비된 송골매는 클럽 활동을 병행하며 2집 레코딩을 계속했는데 2집 앨범을 발매하기도 전에 이미 MBC의 "영11"이라는 프로그램에 8회 연속 출연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이 무렵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갑자기 서울 국제 가요제(MBC 주최)에 출전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땅한 참가곡이 없어 김정선이 가사를 만들고 구창모가 그 위에 곡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공연 때면 마주치곤 하여 송골매와 친하게 지냈던 김수철이 놀러와서 쓱 보더니 구창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순식간에 하나의 곡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모두다 사랑하리'였다. 이곡은 2집에 수록된다.

드디어 1982년 초에 발매된 2집 중에서 구창모가 만든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가요 순위 프로에서도 1위를 몇 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모두 다 사랑하리" 역시 인기를 끌었고 "그대는 나는", "세상만사"등 배철수가 부른 노래들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82년도는 송골매에게는 최고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

1983년 3월 27일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동경 가요제에 "모두 다 사랑하리"로 출전하여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동경 가요제에 참가하기 전 3월 20일 KBS TV의 인기 프로였던 "젊음의 행진" 생방송 중 예상치 못했던 감전 사고가 발생하여 TV를 시청하던 전국의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한 전무 후무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배철수는 의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붕대를 한채로 25일 동경으로 날아가 가요제에 참석했다.

6월에 3집 앨범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서는 구창모가 노래한 "처음 본 순간", 배철수가 부른 "빗물", "한줄기빛"등이 많이 알려 졌다. 1983년 역시 방송, 클럽, 공연등 여전히 바쁜 활동을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에 들어 5월에 4집 앨범을 발매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구창모의 탈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여 팀 내부적으로 안정감을 잃기 시작한다. 동경 가요제 옵저버 참석, 재미 교포 위문 공연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구창모는 정식으로 송골매를 탈퇴하여 솔로로 새로운 출발을 한다.

구창모의 탈퇴에 관해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지만 배철수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밴드 생활이 사실 힘들었다는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도 그렇고 그의 실력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제작자들의 접촉이 계속 있었다. 싸우거나 그렇게 해서 헤어진 것은 아니다. 팀의 살림은 내가 했지만 모든 것은 의논해서 했었고 사이도 좋았다. 그가 떠날 때 많은 설득을 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구창모의 탈퇴 이 후 송골매는 다시 배철수의 색깔로 바뀌게 되고 남은 멤버들이 심기 일전하여 1985년 4월에 5 집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에 수록된 "하늘 나라 우리 님"이 KBS 가요 톱텐 1위를 차지하는 등 히트를 하여 송골매가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송골매 활동과 병행하여 10월에 배철수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한 솔로 앨범 "사랑 이야기"를 발매한다. 밴드의 멤버가 밴드 활동과 상관없이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것은 아마 이 앨범이 처음일 것이다.

배철수는 이 앨범의 발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나의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를 몇 곡 만들었는데 송골매의 앨범에 넣기는 너무 개인적 이였다. 그래서 당시 만든 곡들과 예전의 사랑 노래들을 합쳐서 앨범을 만들었다."

1986년 6집 앨범은 5집까지와는 달리 외부 작곡가의 곡을 받아 녹음하는등 음악적 색깔을 바꾸어 보기 위한 시도를 한 앨범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성공하지 못한 앨범이 되었다. 6집을 녹음하고 이 앨범을 발매할 무렵부터 배철수는 밴드에 대한 권태랄까 지겨움이 느껴지고 멤버들에게 대한 음악적인 실망과 한계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러한 갈등으로 오승동(Drums)과 김상복(Bass)이 팀을 나오게 되고 다른 것은 몰라도 연주력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의 밴드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최대한 뛰어난 멤버들을 찾은 결과 이건태(Drums), 이태윤(Bass), 이종욱(Keyboard)을 영입하여 새로운 송골매를 구성한다.

탈퇴한 오승동과 김상복은 최희선(현 위대한 탄생 Guitar)과 김현준(Vo), 김효성(Keyboard)와 함께 "신"을 결성하여 1986년에 앨범 1매를 발표한다.

1987년 5월에 새로운 멤버와 녹음한 7집이 발매된다.
스타일을 한번 바꿔보기 위해서 영어로 된 곡도 집어넣어 보고 높은음자리의 김장수에게 "새가 되어 날으리" 같은 곡도 받아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애썼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클럽에서는 송골매의 연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도 들었지만 멤버가 바뀌는 와중에 적응이 잘 안되었던 면도 있었으며 역시 앨범은 연주력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멤버들끼리 서로 호흡이 맞지 않은 점도 있었고 밴드 자체가 힘을 잃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였다.

이런 점에 대해 배철수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음악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회의적 이였다.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의 재능으로 팀 분위기를 바꿔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감도 잃어서 다른 사람의 곡을 많이 쓰려고 했다. 지쳐있던 시기였다."

1988년 5월에 8집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이미 송골매가 더 이상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태윤이 부른 "외로운 들꽃"이 히트되어 송골매의 체면을 살려 줄 수가 있었다.

88 올림픽 메인광장에서 개최된 외국 선수들을 위한 이벤트에 출연하여 연주를 할 때 쟈니윤과 처음 만나게 된다. 쟈니윤은 이 때 송골매에게 자신이 나중에 토크쇼를 하게되면 음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 후 SBS에서 방송된 쟈니윤 쇼를 통하여 송골매는 다시금 그들에 대한 시청자의 망각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90년이 되어 "모여라"라는 사회 풍자적인 노래가 수록된 9집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이 곡은 가사가 사회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당시 존재했던 심의 위원회 위원들의 심의 반려로 발표되지 못할 뻔 했던 곡이기도 한데 우여 곡절 끝에 발표할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가 없던 웃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이 곡의 히트로 송골매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미 이 시절은 대중 음악 판도가 서서히 변해가던 그런 시기였다.

또한 배철수의 바쁜 DJ 활동으로 팀 활동이 위축되는 분위기에서 각 멤버들은 송골매 활동과 세션 활동을 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는 사이 밴드 송골매로서의 활동은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송골매들은 각자 자기의 갈 곳을 찾아 날아 가 버리고 드디어 송골매는 1집을 발매 한 후 9집까지 아홉장의 앨범을 남긴채 12년만에 그 이름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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