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신라’의 담대한 포부 담긴 1500년 전 ‘문응대왕 취임사’
                                                                         -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경주 불국사에 다녀왔다. 화장실을 찾아 숲속을 헤매다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를 발견했다. 희미한 글씨로 ‘문응대왕 취임사’라 적혀 있었다. 유적 관리하는 분에게 드리고, 사본을 아는 기자에게 보냈다. 옛날 임금님 취임사이니 요즘 시대에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조만간 기사화될 줄 알았는데 소식이 없다. 이상해서 전화해보니 ‘문서의 신빙성이 의심돼 파기했’단다. 신빙성을 의심받은 그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존경하는 백성 여러분, 저는 오늘 통일신라 왕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지금 제 머리는 갈라치기와 내로남불이 판치는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나라는 우리의 선대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그런 나라와는 동떨어진 나라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도래할 텐데, 이전 왕 시절 ‘헬신라’를 외쳤던 우리 젊은이들은 ‘아, 그때가 천국이었구나!’고 탄식할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제가 백성을 두려워하기보단, 백성들이 저를 두려워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몇 달간 우리는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습니다. 사간원에서 발견된 국정농단 문서 때문에 백성들이 일제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이전 왕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또 감옥에 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지난번 왕 다툼에서 밀려나 있던 제가 난데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 결심했습니다. 저는 저를 지지하는 백성만의 왕이 되겠습니다. 인생은 짧고, 왕의 임기는 더 짧은데, 저를 지지하지 않은 백성까지 제가 섬길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저를 욕하는 백성은 대깨왕들의 괴롭힘에 시달릴 것이며,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붙잡아서 제가 직접 문초하겠습니다. 그러니까 617년 5월 10일, 이날은 통일신라의 분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저를 존경하는 백성 여러분, 지난 왕 시절 여러분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호강에 겨운 소리였습니다. 장담컨대 제 임기가 시작되고 나면 여러분은 발해나 말갈 같은 곳으로 이민 가고 싶어질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제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권위적인 왕 문화를 다시 세우겠습니다. 왕이 되기 전 제가 집무실을 광화동으로 옮긴다거나,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고 한 적 있지요? 그냥 웃자고 해본 소리입니다. 왕은 저 멀리 있는 하늘 같은 존재이지 여러분의 친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저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제 앞에서 ‘경제가 거지 같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잡아다 혼쭐을 내줄 겁니다. 서민 코스프레를 위해 제가 시장에 들를 때면 긴 칼을 드러낸 경호원들이 저를 지킬 것입니다. 무릇 언론이란 왕에게 바라는 바가 많고, 잘한 걸 기억하기보단 못한 걸 끄집어내 비난하려 합니다. 따라서 사간원과의 정례 회담은 없앨 것입니다. 혹시 불만이 있는 백성들은 시내 변두리에 마련한 ‘청원의 북’을 쳐 주십시오. 북소리가 20만 번 울리면 해당 관리가 나와 하나 마나 한 답변을 해드릴 것입니다. 개혁이란 명목으로 포도청을 무력화해, 감히 왕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외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일신라는 원래 당나라의 속국입니다. 그런데 이전 왕들이 바다 건너 쌀나라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당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제 소신인 ‘당나라몽’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그 대신 쌀나라와의 동맹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약화될 것입니다. 반일은 정치적 이득이 크므로, 일본과의 관계는 거의 단교 수준으로 유지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를 반대하는 이는 친일파 또는 토착왜구로 몰겠습니다. 우리 북쪽에 있는 말갈은 원래 우리와 형제의 나라입니다. 형제간의 우애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말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임기 내내 노력하겠습니다. 말갈이 우리 재산을 약탈하고, 또 바다에 빠진 우리 백성을 죽인다 해도, 저는 말갈 편에 서겠습니다. 이런 일련의 외교 행위로 인해 우리 통일신라가 왕따가 되고, 제가 혼밥을 하는 것도 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국내 정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는 강화될 것입니다. 요직에는 저를 집권하도록 도와주신 인사들만 중용하겠습니다. 능력과 적재적소 대신 많이 가진 귀족들만을 우대하겠습니다. 혹시 귀족들의 비리가 들통난다 해도, 제 사람이면 무조건 지켜드리겠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권했으니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최저임금을 올려 일자리를 없애겠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 약속했던 일자리 상황판은 제가 왕이 된 이상 바로 치우겠습니다. 제 치하에서는 그간의 악습이던 정경유착이란 낱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큰 장사꾼(大商) 길들이기만 있을 뿐입니다. 요수수나 흰신발 같은 희귀물자가 필요할 때면, 리재용 같은 대상(大商)에게 시키겠습니다. 왕권 유지를 위해 지역은 물론 계층간, 그리고 남녀간 갈라치기로 서로간의 대립을 조장하겠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면 자영업자들에게만 그 부담을 전가시킬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제 왕정에서 기회는 오직 내 편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 과정은 특권층에만 유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결과는 평등할 것입니다. 몇몇 귀족을 제외하면, 다 같이 못사는 세상이 올 테니까요. 장담컨대 제 임기가 지나고 나면 지난 왕들이 다 성군(聖君)으로 여겨질 겁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제가 하지 않았다 해도 숟가락을 얹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그게 왜 잘못이냐고 우기고, 그게 안 통하면 기준을 바꿔 잘못이 아니게 만들겠습니다. 제가 어쩌다 하는 약속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안 지킬 테니, 그 편이 여러분의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저를 존경하는 백성 여러분, 헬신라가 눈앞에 있습니다. 마음 단단히 잡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