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교회를 무척 싫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종교 성직자를 마귀나 사탄이라 했다. 명절이면 제사 문제로 집안에 분란을 일으켰다. 교회 사람들은 자기네끼리만 돕는 듯했다. 이웃에 형편이 더 어려운 가게가 있어도 같은 교회 신자가 하는 곳에만 몰려갔다. 그들에게는 다니는 교회만 달라도 남이었다. 교파가 다르면 이단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주는 성탄 주간이니 7배의 헌금을 내라는 목사의 설교에 아멘이라고 답하는 신도들이 거룩해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 말씀을 읽은 뒤에 목사가 손에 든 메모지에 이름을 올려 호명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보면서 의아했다. 그런 모습에서 ‘성도’들이 ‘예수쟁이’로 폄하되는 이유가 느껴졌다.

종교 생활은 믿음대로 사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런 이들은 드물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나님의 존재와 섭리가 모든 피조물 속에 미치고 있다는 뜻)하시다고 믿으면서 불상·단군상·장승의 목을 잘랐다. 그들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 않은 걸까?

또 예수님은 난치병 환자를 고친 뒤 당신이 아니라 환자의 믿음이 병을 고쳤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믿음을 굳건히 하기보다 치유 은사를 받은 목회자를 찾아다니고 용하다는 기도원과 금식원으로 간다.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라고 가르치셨지만 많은 이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소리치고 악을 썼다.

성경에서 만난 최고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였다. 그는 십자가 형에 처할 자신의 운명을 알고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뜻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사업 성공, 승진 출세, 자녀 입학 등을 위해 기도했다.

기독교인들의 부에 대한 태도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많은 교회에서 부와 성공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성도’들이 ‘국민 성공시대’를 내건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럼에도, 성경에 쓰인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한 가지만 믿고 따라도 지상 천국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믿음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 장애인, 노숙인, 홀몸 어르신 등 이땅의 ‘작은 자’들을 돕는 성직자들은 꽤 많았다. 한 기업인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가르침에 따라 매출액의 5%를 이웃돕기에 쓰는 것을 목표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대신 세상이 필요로 하지만, 남들이 하려 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라고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또 어떤 목사는 자신의 아이보다 남의 아이들이 더 잘되기를 기도하라고 설교했고, 부처님 오신 날 자신의 교회에 연등을 거는 목사도 있었다. ‘예수쟁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세상의 모든 교회, 나아가 온누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길 ….


2008-12-23  한겨레프리즘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bokk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