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에토벤 :  Beethoven, Ludwig van(1770.12.17 ~ 1827.3.26)

 

독일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두 남동생 앞으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며 귓병의 고통을 토로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로 "에흐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한편 베토벤이 사망하여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도 준비되었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악성 베토벤은 고전 음악의 최대의 완성자인 동시에 그 완전한 형식적인 예술에 보다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내용을 담은 위대한 작곡가 였다. 그는 영웅적인 기백에 백절불굴의 투지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한 승리자였으며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2의 모짜르트로 만들기 위해 엄한 교육을 시켰다.그는 모짜르트처럼 신동은 아니었으나 음악적인 천분을 마침내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17세 때에 그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빈으로 갔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교육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1973년, 22세 때에 그가 빈에 나타났을때는 작곡가라기보다는 먼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생활은 곤란했고 사랑은 실패했으며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귀병을 앓고 있었다. 1814년 이래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 속에서도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이 나타났다.

 


그의 작품은 보통 3기로 나누는데,

 

[제1기 1786~1803]
초기의 작품으로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때다. 교향곡 제1,2번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기 1804~1816]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이다.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작품이다.

 

[제3기 1817~1827]
초인간적인 최고의 예술인데 영감의 창작기이다.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이후의 감각을 초월한 시대으 작품을 보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9번 등이 있는데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음악사상 최고에 속한다.베토벤이야말로 많은 유산을 우리 인류에게 남겼다고하겠습니다.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토벤의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실제로는 7살)이라고 주장하였다.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는 베토벤이 보조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4년에 죽었으나, 일찌기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 젊은 베토벤의 음악 공부를 격려하고 돈도 대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본의 선제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아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본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형 요제프 2세가 빈에서 실시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을 도입하여, 교육과 예술에 지원을 늘렸다. 당시 10대였던 베토벤도 확실히 이러한 개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프리메이슨 사상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는데, 네페를 비롯한 베토벤 주변 사람들은 일루미나티 지부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청력 상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그는 심각한 귀울음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가령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머리카락 시료에서 납이 높은 수준으로 검출되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널리 분석되었다. 납 중독일 가능성도 매우 높으나 이와 관련된 청력 상실이 베토벤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바로 바깥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이런 책에다가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책에다가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제자 안톤 신들러가 음악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버렸다.(또는 고친 것도 있다)

 

 

음악으로 본 그의 인생과 연대기
 
1770 年: 12월16일 Johann van Beethoven(the Elector of Saxony 와 Magdalena Kewerich의 테너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남.

1780 年: 본 궁정(the Court of Bonn)의 오르가니스트이자 국립극장의지휘자인 Christian Gottlob Neefe의 문하생이 됨. 

1787 年: 빈(Vienna)을 여행하며, 모짜르트를 만남, 어머니의 건강악화로 본(Bonn)으로 돌아옴, 7월17일 어머니 사망.

1789 年: 베를린대학에 입학, 아버지가 궁정가수직에서 해고되자 가문의 가장이 됨, 궁정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리스트가 됨.

1791 年: 바이올린 협주곡을 일부 작곡 함, 12월5일 모짜르트사망, the von Breuning 가족과 Count Waldstein의 친구의 음악교사가 됨

1792 年: 현을 위한 삼중주곡을 작곡함, 빈(Vienna)으로 떠남,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냄, 아버지 사망.

1794 年: 피아노트리오 op. 1을 작곡함, the Burgtheater에서 첫연주회를 가짐, 귀가 멀이지기 시작함.

1796 年: 뉴렘베르그(Nuremberg), 프라하(Prague), 드레스덴(Dresden), 베를린(Berlin)을 여행하며, 첼로 소나타op. 5, 피아노 소나타op.2(하이든에게 헌정됨)을 작곡함.

1798 年: 피아노 소나타op. 10, 바이올린 소나타op. 12 를 작곡함, Neefe 사망

1801 年: 봄(Spring) 소나타op. 24 , 전원(Pastoral, 피아노소나타op. 28)을 작곡함.

1803 年: 영웅(Eroica) 교향곡에 착수함,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완성하고 초연함, 크로이쳐(Kreutzer) 소나타를 작곡함. 

1807 年: 교향곡 제4번,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초연함. 교향곡 제5번op. 67, 코리오란 서곡(Coriolan), 미사곡( Eisenstadt에서9월13일초연)을 작곡함.

1808 年: 피아노,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작곡, 교향곡 제6번전원(Pastoral)을 완성함, 교향곡 제5,6번을 초연함

1809 年: 프랑스의 나폴레옹군대가 비엔나까지 진군함, 피아노 협주곡 제5번op73, 사중주op. 74, 피아노 소나타op. 78, 79, 81, 미그논(Mignon)을 완성함

1810 年: 베토벤과 교제했던 서너명의 여인중의 한명, Bettina Brentano를 만남, 괴테의 비극 에그몬트(Egmont)를 음악화함, 사중주op. 95를 작곡함, 피아노협주곡 제5번을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초연함.

1811 年: 아테네의 멸망(The Ruins of Athens), 대공삼중주(Archduke Trio)을 작곡함

1812 年: 괴테(Goethe)를 만남, 불멸의여인(Immortal Beloved)에게 편지를 씀, 교향곡제7, 8번을 작곡함

1813 年: 칸타타(Glorious Moment)를 작곡함, 교향곡 제7번,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Victory)를 초연함.

1815 年: 첼로 소나타 두곡을 작곡함, 스코틀랜드 노래를 작곡함op.108; 조카 카를(Karl) 법정보호자가 됨.

1816 年: 피아노 소나타op. 101와 An die Ferne Geliebte를 위한 6곡의 노래를 작곡함.

1817 年: 교향곡 제9번의 첫번째 총보를 쓰기 시작함.

1820 年: 소나타op. 109을 작곡함

1822 年: 피아노 소나타 작품번호 110과 111작곡함, 장엄미사(Missa Solemnis), Weihe des Hauses 서곡op. 124을 작곡함.

1826 年: 사중중곡작품번호131과 135을 작곡함, 폐렴에 걸림.

1827 年: 3월26일 세상을 떠남.
 


※ 간추린 베토벤의 유명한 곡

교향곡
교향곡 1번 다 장조 작품번호 21 (1800년)

교향곡 2번 라 장조 작품번호 36 (1803년)

교향곡 3번 내림 마 장조 "영웅" 작품번호 55 (1805년)

교향곡 4번 내림 나 장조 작품번호 60 (1807년)

교향곡 5번 다 단조 "운명" 작품번호 67 (1808년)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작품번호 68 (1808년)

교향곡 7번 가 장조 작품번호 92 (1813년)

교향곡 8번 바 장조 작품번호 93 (1814년)

교향곡 9번 라 장조 "합창" 작품번호 125 (1824년)


피아노곡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피아노 소나타 11번 '화려한 대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