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레가와 그의 제자들

먼저 언급하여야 할 인물은 역시 프란시스코 타레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그동안 침체되어 있던 오랜 기타의 명맥을 이어 근대적인 연주법과 새로운 기타의 작곡기법을 확립한 "근대 기타의 아버지" 혹은 "기타의 쇼팽"으로 불리우는 중요한 인물이죠.
많은 초심자들이 지금도 클래식 기타 입문의 동기로 삼고 있는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만, 그의 작품은 대작은 드물지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품들과 편곡들로 기타가 20세기 들어 다시 전면에 부각하는 토양을 갖추게 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문하에 몇명의 출중한 제자를 두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역시 미구엘 료벳, 에밀리오 푸홀, 다니엘 포르테아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타레가 학파"로 불리우는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이어 기타라는 악기의 발전을 계속 탐구하고 연주법의 향상과 기타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들이 되겠으며 이 타레가의 제자들은 SP로 그 음원이 남아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제자 중 가장 출중한 인물은 역시 미구엘 료벳이 되겠는데 그는 타레가로부터 작곡기법을 충실히 전수받아 자신이 직접 작/편곡한 훌륭한 기타곡도 남기고 있는데, 오늘날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카탈로니아 지방의 전래 민요 10여곡을 기타 독주를 위해 편곡한 "카탈로니아 민요집"은 그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그는 스페인 안에서만 주로 활동하였던 스승 타레가와는 달리 유럽의 각지와 아르헨티나 등 스페인의 영향이 짙은 남미각국을 순회하면서 기타의 우수성을 두루 알리고 기타가 전파되지 않고 있던 지역에 기타를 보급하는 등 잊지 못할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명의 거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명은 안드레스 세고비아이며, 또 한명은 아구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입니다.



2. 세고비아와 바리오스 망고레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스페인의 리나레스란 곳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어린시절부터 기타를 독학하여 유명 연주자를 꿈꾸어 왔다고 합니다. 그는 타레가의 제자가 되고자 바르셀로나로 향하던 중 타레가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됩니다. 크게 상심한 그였지만 근성이 남달랐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바르셀로나로 가서 타레가의 제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그들의 노하우와 악보들을 몸으로 뛰며 익히게 됩니다.

후에 그는 오히려 자신이 습득한 그 지식들을 갈고 닦아 더욱 훌륭한 연주상의 기교를 확립한 선구적이고도 강인한 카리즈마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타레가 학파가 기타의 아름다움을 전승하고 발전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타를 살롱악기의 범주에서 벗어나 다른 고전악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콘써트 악기로 격상시켜 고전시대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게 하겠다는 큰 야망과 포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빠리 등 해외로 진출하여 갈고 닦은 기량으로 유명 작곡가들을 사귀고 자극을 주어, 고답적인 기타의 레파토리를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인 본격 기타곡을 작곡하도록 불철주야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어, 페데리코 모레노 토로바, 호아퀸 투리나, 호아퀸 로드리고 등 근대 스페인의 주요 작곡가들로 하여금 명작 기타곡을 작곡하게 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물론 스페인 작곡가 이외에도 남미로 눈을 돌려 브라질의 하이토르 빌라-로보스, 멕시코의 마뉴엘 마리아 폰세 등 유명 고전 현대 작곡가들이 이 악기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기타곡을 작곡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가 남미에서 처음 활동하던 무렵 그는 파라구아이 출신의 귀신같은 기타 연주자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배우는 길이라면 천리를 마다않던 그는 거기서 놀라운 연주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아구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였습니다. 그는 과라니 인디언 혼혈인으로서 엄청난 테크닉의 소유자이자 서구의 작곡법을 마스터하고 기타로 훌륭히 그 기법을 옮기는 천재적인 작곡가였습니다.

그러나 망고레는 세고비아와 같은 야망과 포부는 가지지 않고 있었으며, 단지 기타의 아름다움을 타고난 남미의 동물적인 감각과 천혜의 작곡능력으로 타레가처럼 수없이 많은 유니크한 작품을 남긴 연주가 겸 작곡가로 만족하는 사람이었죠. 세고비아는 망고레에게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으나 타레가의 제자였던 료벳과 마찬가지로 그를 일생의 라이벌로 경계하여서인지 후에 세계 기타계를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한 이후에도 망고레의 작품은 공식석상에서 한곡도 연주하지 않았고 음반으로도 남기고 있지 않아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오늘날 받고 있기도 합니다.

망고레의 작품은 정말 대단한 것들입니다만 그는 성격이 상당히 낙천적이고 친구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작곡한 자필보를 남미 전역에 뿌리고 다녀 정식 출판도 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고, 손에서 손으로 전래되어 내려오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도 한동안 그가 잊혀진 작곡가로 지내게 하는데 일조하였다고 사료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망고레가 상당한 분량의 SP 녹음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SP녹음들은 유실된 그의 작품들을 복원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기도 하고 있으며, 후세에 자신의 존재와 위대성을 알리는 중요한 증거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하간 세고비아는 전세계를 돌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탁월한 기량을 무기로 세계의 고전음악 애호인들에게 기타라는 악기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주요 작곡가들이 기타곡을 작곡하도록 고무한 업적 이외에도, 세고비아는 후진 양성에도 남다른 정성을 쏟아 세계각지의 유명 음악원에 가능한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클래식 기타의 전문 교육과정이 자리잡도록 힘썼으며 또한 세계각지의 유망 연주자를 발굴, 교육하여 자신이 이루어낸 업적이 보다 굳건히 자리잡고 세계속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상기의 관점에서 보면 세고비아가 장수한 연주자라는 사실은 20세기 기타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EMI와 MCA에서 다수의 SP 및 LP의 녹음을 남겨, 사후에도 오늘날까지 그의 거대한 행보를 여전히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3. 세고비아 이후의 거장들

워낙 독보적으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세고비아라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연주가가 없겠습니다만 세고비아 계보의 연주가 중 특기해야 할 연주자는 줄리안 브림, 존 윌리암스, 알리리오 디아즈, 오스카 길리아, 호세 토마스, 크리스토퍼 파크닝 정도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모두 처음부터 세고비아에게 교육을 받은 연주자도 물론 아니며, 또 자신들이 세고비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간 것도 사실이지만, 세고비아가 세계 기타계에 그 토양을 충실히 닦아 놓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1) 줄리안 브림

줄리안 브림은 영국의 연주가로 1933년생으로서 20세기 중반에서 후반부에 걸쳐 활동한 클래식 기타 연주자 중 대표적인 연주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세계에 폭넓은 고정 애호가를 확보하고 있는 그는 RCA 레이블로 수없이 많은 명반들을 녹음하였고, 그 특유의 어법과 빛나는 악곡의 해석은 지금도 많은 애호가로 하여금 그를 이시대 최고의 기타주자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그도 곧 칠순을 앞두고 있습니다만...그는 어린시절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타를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어린시절부터 기타연주로 청중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13세가 되던 1947년 2월 17일, Cheltenham에서 그의 공식적인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이후 그는 2차대전 이후 영국 음악계를 대표할 연주가 중 한명으로 주목받으며 착실히 실력을 연마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고비아가 영국을 방문한 것은 이 무렵으로, 그는 브림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정기적으로 영국을 방문할 때마다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기타협회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관계로 영국식 전통 음악교육을 후에 왕립 음악원에서 받고 있던 브림에게 스페인 사람인 세고비아가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다는 후일담은 브림이 얼마나 영국에서 촉망받는 연주가였는지 알려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림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급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은 이후에도 세고비아를 개인적으로 자주 방문하여 그의 조언을 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인임에도 스페인의 음악을 너무나 동경하였던 브림은 전성기에 역작 "스페인의 기타음악" 시리즈를 RCA에서 녹음하였는데 이러한 전후관계 때문인지 세고비아도 생전의 인터뷰에서 브림이 가장 훌륭한 연주가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브림은 기타 연주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상태에서도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음악의 세계에 대한 갈등으로 많은 인간적인 방황을 했습니다...
매일 그의 집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고 술로 밤을 새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화가였던 그의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후에 결혼하게 되는 스캔들을 뿌리기도 했습니다만...

후에 그는 그 시기를 "인생에 있어 매우 거칠었던 시기"였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댓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죠... 음주운전을 하던 그의 오픈카가 전복되어 오른손에 치명적인 부상를 입은 것입니다.

기타의 연주에 있어서 세고비아는 "왼손은 노동이요 오른손은 예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기타리스트에 있어 오른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브림은 그의 "거친 시대" 덕분에 이 오른손을 희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렵사리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결혼한 아내와도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받으며 결별로 이어졌구요. 이 엄청난 불행에 좌절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브림의 명성을 익히 아는 영국의 의료진은 첨단 기술로 신경접합수술까지 시술하여 일단 그의 오른팔을 최대한 살리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무엇보다 섬세한 콘트롤이 필요한 기타 연주를 이전처럼 다시 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이제 브림은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 무렵 스페인의 기타음악 시리즈를 음반과 비디오로 제작하고 많은 진행을 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그 작업조차 중단되게 된 것은 물론이구요.
그는 좌절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달 후 재활운동을 시작하며 그의 눈에는 투지가 불타 올랐습니다. 사고 이전에 브림은 한 인터뷰에서 "브림,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누구죠?"라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하이든을 가장 좋아합니다...그의 음악에는 삶의 여유와 유우머, 위트가 넘칩니다...대 작곡가 중에서 그런 음악가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죠"라고 브림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브림의 음악을 들어 보면 그의 연주 속에도 항상 풍부한 표정과 삶에 대한 진한 애착이 묻어 있습니다. 이 삶에 대한 애정이 힘겨운 시기에 투지로 불타올라 재기에의 의욕을 다시 불태우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다시 웃음을 찾았지만 그의 오른팔은 여전히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습니다.
10분만 손가락 연습을 해도 참을 수 없는 통증이 그의 오른팔에 번져 올라 1시간씩 휴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그는 매일매일 조금씩 연습량을 늘여 나갔고 정말 조금씩 그의 오른손이 기타 속으로 다시 융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가 브림이 다시 기초적인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고통을 견디며 힘겹게 매일 하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그것도 얼마나 회복될지 기약도 없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딛고 어느 정도 연주까지 가능하게 회복되었을때 모든 사람들은 그의 초인적인 의지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런 불굴의 의지로 사고 후 불과 1년 뒤 그는 재기 무대에 섰습니다. 그러나...이날 연주에 대한 여론은 너무나 브림에게는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브림의 재기는 정말 초인적인 것이고 경의를 보낸다...그러나 이날 위그모어 홀에서의 연주는 냉정히 말해 예전의 그의 연주와 비교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다시 브림의 연주를 예전처럼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평가에 그는 다시 좌절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죠.

다시 좌절에 빠진 브림은 또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재기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과거 브림도 세고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훌륭한 영국의 유명 작곡가를 자극해 훌륭한 현대작품을 작곡하게 했는데 벤자민 브리튼(녹터널), 윌리암 월튼(5개의 바가텔), 로드니 베넷(4개의 소품), 레녹스 버클리(소나티네)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브림이라는 걸출한 기타리스트의 불행을 슬퍼하였습니다.
이들 작곡가들 중 한사람이 실의에 빠져 있는 브림을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자네 요즘 정말 말이 아니로군...연주고 뭐고 다 잊고 나랑 여행이나 한번 가지 않겠나?"하고 제의하였습니다.
브림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먼 변방의 산악국가인 네팔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기서 한 이발소로 브림을 데리고 간 그는 "우리 여기서 같이 이발이나 하세"라고 말하고 브림을 이발소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이발소의 주인이 기타를 좀 연주한다고 브림에게 귀띰하고, 이발소 주인에게는 "이보게,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명수 줄리안 브림일쎄...어떤가 자네 연주나 한 곡 이 대가 앞에서 들려 줄 수 있겠나?"하고 운을 띄웠습니다.

이발소 주인은 "아이구, 이런 대가께서 이런 곳가지 왕림하시다니...영광이올습니다...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제가 한 곡 올리옵습죠"하고 몇개의 소품을 연주하였습니다. 물론 그 연주는 정말 형편없는 연주였습니다만... 그는 브림에게 이발소 주인의 연주가 끝난 후 속삭였습니다. "보게나...이 사람의 연주보다 자네의 연주는 아직 뛰어나지 않은가...그럼에도 자네는 지금 불행하고 이 사람은 대가가 자기의 연주를 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네...내가 보기에 자네는 정말 욕심이 많은 사람일세"

여행이 끝난 후 브림은 다시 기타를 잡았고 그 어떤 평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다시 연주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EMI녹음이 과거의 RCA와 비교하여 아쉬운 맛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음색과 화려한 기교의 문제일 뿐 그의 음악은 과거와 비교하여 더욱 깊이있고 스케일이 크며 진중해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친 음악활동으로 영국을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서훈을 받은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2) 존 윌리암스

또 한명의 연주가는 존 윌리암스입니다.  먼저 이 연주자의 일대기가 정말 잘 정리된 곳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http://plum.cream.org/williams/입니다.

그의 바이오그래피, 디스코그래피, 최근 소식등이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어 이곳을 다 둘러보셨다면 존 윌리암스에 대해서는 박식하다고 자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역시 어린시절 아버지에게서 기타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의 부친 랜 윌리암스는 재즈와 클래식을 모두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였으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 간파, 런던으로 이주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합니다.

그는 세고비아의 눈에 들어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도 이탈리아 시에나의 세고비아 클래스에 초빙되어 지도를 받았으며 18세의 런던 위그모아 홀 데뷔 연주회 이후 세고비아로부터 "기타의 황태자"란 칭호를 얻게 됩니다. 이 칭호는 상당히 영광스런 칭호였음에도 존은 평생을 그 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던 자유분방한 성격의 존은 영화음악, 프로그래시브 그룹(스카이)의 참여 뿐만 아니라 세고비아 연주의 큰 문제점 중 하나인 "지나치게 기타적인" 어법에 거부감을 보였고, 또한 스테이지에서의 자유로운 복장과 태도 등으로 거장 세고비아의 심기를 상당히 거슬렸다고 합니다.

브림이 거친 시기가 있었다면 존 또한 그러하였던 셈이죠. 그러나 그의 실력과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과의 공존을 도모한 그의 적극적인 태도 역시 좋은 성가를 올려 앙드레 프레빈, 다니엘 바렌보임, 이착 펄만 그리고 쟈클린 뒤프레 등 당대의 유명 연주가와의 협연과 공동작업 등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이 그를 통해 열린 부분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1941년생이니 이제 동안을 자랑하던 그도 우리나이로 환갑을 넘겼군요. 그는 CBS-SONY 레이블을 통해 현재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세고비아 이외의 스페인 비루투오조들

한편 세고비아 이외에도 스페인에는 많은 비루투오조들이 활동하고 스페인 기타의 명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들 중에는 타레가 계파의 이름을 이어 나간 연주자도 있었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유파를 형성한 경우도 있었으며 스페인 내의 음악원에서 정식 음악교육과 기타를 병행하여 자신의 입지를 닦은 연주자도 있었습니다.

사인즈 데 라 마자 형제, 셀레도니오 로메로와 그의 아들들(로스 로메로스), 그리고 나르시소 이에페스 등이 이들 부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이들 각 인물들에 대해서도 차차 언급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 남미의 타레가 계파 유입과 아벨 깔레바로, 그리고 라플라타강 유역의 기타학파

전술한 남미에의 스페인 기타의 유입은 타레가 계파가 남미에서도 이어나가게 한 계기가 되었는데, 료벳의 제자 중 여류로서 아르헨티나의 마리아 루이자 아니도 여사가 첫 손에 꼽힙니다.

20세기 기타 사상 최초의 여성 비루투오조였던 그녀는 아르헨티나에 기타가 토양을 내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제자 중 동국의 폼포니오-자라테 부부는 부부 이중주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후에 기타의 연주기법을 이론적으로 정비한 우루구아이의 아벨 깔레바로와 함께 "라플라타 강의 기타학파"라는 남미의 거대한 기타 연주자 계보가 자리잡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계보의 연주자로 현재 세계각국의 유명 콩쿨을 석권하면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연주가라면 알바로 삐에리, 로베르토 아우셀, 발타자르 베니테즈, 그리고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면면 역시 연주자 코너에 이미 소개 드린 바 있구요. 연주법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와 체계적인 이론을 확립한 아벨 깔레바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상세히 다루어야 하겠습니다.


6. 이후 세계각지의 명연주자들의 배출

전술한 큰 흐름 속에서 타레가의 영향과 세고비아의 야심찬 행보는 20세기의 기타가 연주악기로서 자리잡는데 큰 공헌을 한 셈이고, 이후 그들의 제자들이 토양을 굳건히 하고 범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간 셈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세계속에 기타가 뿌리깊게 자리잡아 저마다 실력을 뽐내는 주자를 배출하는 황금기가 구가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쿠바 출신의 마뉴엘 바루에코, 영국의 데이비드 러셀 등은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타음악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현역 최고의 기타리스트들이 되겠구요. 지금은 그리스, 발칸지역 국가, 동구권을 비롯, 동양권에서도 중국, 일본 등 신예 연주자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아쉽다면 러시아의 기타음악 전통도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전혀 언급이 되질 않았습니다.


출처 : '클래식컬 네티즌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