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에서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다 빈에 자리잡은 모차르트가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를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오페라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대본에 달려 있다”고 호언했던 다 폰테. 그의 탁월한 언어감각과 ‘본능에 가까운’ 흥행 감각이 없었더라면 음악이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모차르트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 오페라로 꼽히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 세 편의 대본은 모두 다 폰테의 손끝에서 나왔답니다.

 

예술가 경력으로 따지자면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 유럽을 돌며 연주여행을 했던 모차르트의 출발이 훨씬 빨랐지만, 당시 빈에서 모차르트가 아직 충분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다 폰테는 이미 살리에리 같은 최고 궁정 음악가의 오페라 대본을 쓰는 명사였지요. 그러나 젊은 시절에 칸트, 루소, 볼테르 등의 영향을 받아 뚜렷한 계몽주의 성향을 지녔던 다 폰테는 모차르트와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오페라
1782년에 작곡가 파이지엘로가 발표한 [세비야의 이발사](파이지엘로의 작품보다 훨씬 유명한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1816)는 훗날의 리메이크 작품입니다)가 장기 흥행에 성공하자 모차르트는 그 인기에 힘입어 성공해 볼 계획으로 '이발사' 원작자인 보마르셰의 속편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을 오페라로 만들자고 다 폰테를 설득합니다.

 

사실 이 작품이 연극으로 파리에서 초연될 무렵 당시 루이 16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작품의 상연을 전면 금지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작품이군. 절대로 상연하면 안 돼!” 국왕 뿐만 아니라 귀족들 대부분이 치를 떨며 분개했지요. 가장 큰 이유는 기존의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 작품의 정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마르셰의 이 문학적 저항은 몇 년 후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현실화됩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이중의 장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그 외피(外皮)만을 본다면 TV 연속극과 비슷한 ‘부부싸움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지요. 전편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그처럼 난리법석을 떨며 갖은 난관을 뚫고 결혼에 성공했던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 커플이 그 속편인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에게 눈썹을 치뜨는 전투적인 부부로 등장합니다.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커플은 결혼을 앞둔 피가로(전편에서는 이발사, 속편에서는 백작의 하인. 백작의 결혼을 성사시킨 공로로 하인이 되었습니다)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입니다. 바람둥이 행각으로 아내 로지나를 수없이 좌절시켜온 백작은 이제 수잔나에게까지 흑심을 품지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피가로는 수잔나 및 백작부인과 연대해 희극적인 계략을 써서 백작을 무릎 꿇게 만들고, 백작부인은 사과를 받아들여 남편을 용서합니다.
 
거짓말 릴레이, 성적 긴장과 정치적 긴장의 긴박한 줄다리기
그러나 [피가로의 결혼]은 부부관계 또는 남녀관계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통속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말 릴레이’ 안에 시퍼렇게 날이 선 계급의식이 숨어있으니까요. 작품의 외피를 타고 흐르는 ‘성적(性的) 긴장’은 그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치적 긴장’과 결국 하나로 연결됩니다. 보마르셰의 원작 연극 제 5막에서 백작을 겨냥한 피가로의 독백은 신분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새로운 시민계급의 분노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백작, 당신은 절대로 수잔나를 얻을 수 없어! 귀족의 신분, 부, 높은 지위, 품위... 그런 것들을 다 지녔다고 우쭐대지. 하지만 그처럼 다양한 특권을 얻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한 일이 대체 뭐가 있지?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잖아!”

 

이 전복적인 발언에 왕실과 귀족들은 놀라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은 상연이 금지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대본작가 다 폰테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 5막의 독백을 애초부터 빼버렸지요. 그러나 이미 1막에서 유명한 아리아 ‘나비는 이제 날지 못하리 Non piu andrai’를 부르는 피가로는 표면상으로는 백작의 방자한 시동(侍童)인 케루비노를 조롱하지만, 실제로는 백작을 비롯한 귀족계급 전체에 날카로운 분노의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백작부인인 로지나 역시 원래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오페라의 4막 ‘정원의 밀회’ 장면에서 백작부인이 하녀 수잔나와 옷을 바꿔 입고 수잔나 대신 밀회 장소에 나가 백작을 골탕먹이는 것은 무엇이든 멋대로 하는 귀족계급의 전횡에 대한 시민계급의 통쾌한 보복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거의 모든 배역이 주옥 같은 멜로디의 아리아를 부른다
‘나비는 이제 날지 못하리', '여러분은 사랑을 아시겠지요’, ‘아름다운 시절은 다 어디로 가고’ 등 주옥같은 멜로디의 유명 아리아가 유난히 많은 이 작품에서는 거의 모든 배역이 솔로 아리아를 부릅니다. 그러나 작품의 상황과 캐릭터의 진실을 더 잘 보여주는 건 오히려 솔로 아리아보다 중창과 레치타티보 쪽입니다. 마르첼리나와 수잔나의 충돌, 목적을 위해 거짓으로 백작을 유혹하는 수잔나, 남편을 정원으로 불러내는 편지를 수잔나에게 받아쓰게 하는 백작부인(편지의 이중창), 사람들 앞에서 백작의 비리를 들추며 그를 망신시키는 바르바리나, 백작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피가로 등, 수많은 중창 장면이 참으로 설득력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작업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기 위해, 다 폰테가 대본을 쓰는 동안 그 대본을 따라가며 동시에 작곡을 하다시피 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매끄럽고 유연하고 힘이 넘칩니다. 모차르트는 파이지엘로의 로지나가 불렀던 1막의 E장조 카바티나를 모방해 [피가로의 결혼]에서 로지나의 2막 아리아 ‘사랑의 신이여, 위로해주소서 Porgi, amor’를 같은 조성과 같은 템포(라르게토)로 설정하고, 파이지엘로와 마찬가지로 클라리넷과 파곳으로 반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가로의 결혼]이 1786년 빈에서 초연되었을 때, 몇 해 전 파이지엘로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빈 청중의 반응은 냉담하거나 미적지근할 뿐이었지요. 그나마 가장 인기가 있었던 건 케루비노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 수잔나와 부르는 듀엣이어서, 초연 때 케루비노는 어쩔 수 없이 연달아 두 번 창문에서 뛰어내려야 했답니다. 다행히도 이듬해 모차르트를 초청한 프라하의 청중은 [피가로의 결혼]의 절묘한 희극적 오케스트레이션에 감탄할 수 있는 음악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씹을수록 맛이 깊어지는 이 음악을 놀랍게도 그들은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간략한 줄거리와 추천 음반 & DVD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 피가로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는 서로 사랑해 결혼하려고 합니다. 수잔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백작이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피가로에게 귀띔하고, 분개한 피가로는 백작부인, 수잔나와 함께 계략을 꾸며 백작을 혼내주기로 합니다. 수잔나는 백작에게 밤에 정원에서 몰래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고, 그 밀회 장소에는 수잔나로 변장한 백작부인이 나타납니다. 백작의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반지까지 선물로 받은 백작부인은 하인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을 폭로하고, 골탕을 먹은 백작은 아내에게 무릎 꿇고 사죄합니다. 

 

1. [음반] 로렌초 레가초, 베로니크 장, 파트리차 초피, 사이먼 킨리사이드 등, 콘체르토 쾰른 및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르네 야콥스 지휘, 2006년 녹음

 

2. [음반] 체자레 시에피, 리자 델라 카사, 힐데 귀덴, 알프레트 포엘 등,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 1955년 녹음

 

3. [DVD] 어윈 슈로트, 도로테아 뢰쉬만, 미아 페르손, 제랄드 핀리 등,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안토니오 파파노 지휘, 데이비드 맥비커 연출, 2006년 공연 실황 

 

4. [DVD]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도로테아 뢰쉬만, 안나 네트렙코, 보 스코프후스 등, 빈 필하모니와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 클라우스 구트 연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2006년(한글자막)
 

                                                                                                             - 글 이용숙 / 음악평론가, 전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