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가 가난의 밑바닥을 몸부림치며 허덕이다 죽은 지 6년 뒤인 1797년에 빈에서 슈베르트는 태어났다. 그의 일생 역시 모짜르트와 다름없는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하여 돈이 들지 않는 콘비크트 국립학교에 들어가 급비생이 되었다. 콘비크트는 궁정소년 합창단(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의 단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그 후 변성기를 맞이하여 더 이상 합창단원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 슈베르트는 아버지가 교장직에 있는 빈 변두리의 한 초등학교에서 대리 교사로 한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친구 집을 떠돌며 작곡에만 몰두했다.


□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괴로움이 진하게 고여있는 노래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은 그의 몸을 차츰 좀먹기 시작하여 1823년(26세) 무렵부터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그는 한 해 전에 교향곡 제8번 [미완성]을 썼고 다음 해에는 부수음악 [로자문테]와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딸]을 작곡했다. 그 무렵, 슈베르트는 “남의 진짜 고독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나의 고통에서 우러나온 작품이 세상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고 일기에 쓰고 있다. 1826년(29세)에는 스스로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했는지 [현악 4중주곡 D단조](죽음과 소녀)를 작곡했고 이어 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완성했다. 한 가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흔히 [겨울 나그네]라고 하지만 원제 ‘Winterreinse ’는 영어 ‘Winter Journey’이며 우리말로 ‘겨울 여행’또는 ‘겨울 나그네 길’이 옳다. ‘송어(Die Forelle)’를 ‘숭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슈베르트는 1822년에 빌헬름 뮐러(Wilhelm Muller)의 시를 우연히 읽어보고 큰 감동을 느꼈다. 그의 첫 시집에서 스무 편의 시를 골라 작곡한 것이 [아름다운 물방앗간 집 딸]이었다. [겨울 나그네]도 같은 뮐러의 시에 곡을 붙였으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딸]같은 극적인 이야기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내용은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삶의 희망을 잃고 끝없는 겨울 나그네 길을 떠나면서 그 동안에 겪는 갖가지 괴로운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어느 곡에나 실연의 괴로움이 진하게 고여 있다. 전 곡은 다음 스물네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1.안녕히 주무세요 (Gute Nacht)
실연한 청년이 겨울 한밤 중에 연인 집 앞에서 정처없는 방황의 길을 떠난다. 망설이는 마음을 나타낸 보행 리듬이 색다르며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안타깝다.

“낯선 타향 사람으로 이곳에 왔다가 그대로 낯선 이로 이곳을 떠난다. 덧없는 봄날은 숱한 꽃다발을 내게 바치며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소녀는 사랑을 말하고 그 어머니는 결혼까지 의논했다 – 지금 세상은 비꼬이고 흰 눈이 길을 덮고 있다. …… 네 꿈을 깨트리지 않도록, 네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며시 문을 닫는다. 지나는 길에 네 집 문 앞에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적으리라. 내가 얼마나 지극히 너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안제인가는 알 수 있도록 …….


2. 바람개비 (풍향기, Die Wetterfahne)
바람에 나부끼는 풍향기가 청년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집 지붕 위 바람개비에 바람이 닥쳐와 희롱하고 있다. 쓰라린 내 마음은 도망치는 이 불쌍한 사나이를 비웃는 것만 같구나…….”


3. 얼어붙은 눈물 (Gefror’ne Tränen)
스타카토(음을 끊어서 연주하는 주법)의 반주는 얼어붙은 눈물을, 노래는 마음의 괴로움을 표현한다. “얼어 붙은 눈물이 내 두 볼에 떨어진다. 울고 있음을 나는 미처 몰랐던가? 오 눈물, 나의 눈물이여, 어쩌면 이다지도 미지근한가,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 얼음이 되다니? 가슴의 샘에서 용솟음쳤을 때는 그토록 뜨겁게 끓어올랐건만, 온 겨울의 얼음을 죄다 녹일 듯이!”


4. 얼어붙음 (Erstarrung)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딸]은 물의 이미지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는 얼음이 주역이 된다. “나는 덧없이 눈 속을 헤맨다,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찾으려고, 나와 팔짱을 끼고 함께 지나온 그 푸른 들판에서. 나는 대지에 입맞추리라, 낯익은 땅 바닥이 들어날 때까지, 내 뜨거운 눈물로 눈과 얼음을 녹이려네.”


5. 보리수 (Der Lindenbaum)
녹아버린 얼음 위로 맑은 샘물이 흐르며, 문득 연인에 대한 회상이 보리수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타고 스며든다. 청년은 한밤중에 불어닥친 돌풍 속을 뚫고 거리를 떠나지만 마음은 그곳에서 맴돈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한 그루 보리수, 나는 그 그늘에서 꿈을 꾸었다, 갖가지 달콤한 꿈을. 나는 그 나무 밑동에 숱한 사랑의 말을 새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마음은 거기에 이끌렸다. 나는 지금도 깊은 한밤의 고요 속에 그 곁을 지나야 했다, 캄캄한 어둠 속이었으나 두 눈을 감았다. 마침 나를 부르듯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렸다. ‘벗이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네 안식처를 얻으리니.’하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불어닥쳐 내 모자를 벗겨 갔지만, 나는 돌아 보지도 않았다. 이제 많은 시간이 지나 그곳을 멀리 떠났지만, 아직 그 부스럭 소리를 듣는다, ‘거기 네 안식처가 있다!’고.”


6. 홍수 (Wasserflut)
노래 소리는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피아노 반주의 리듬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나타낸다. “용솟음치는 눈물이 흰 눈 위에 속절없이 떨어진다, 차가운 눈송이가 목마른 열망으로 뜨거운 슬픔을 삼킨다. ……”


7. 냇물 위에서 (Auf dem Flusse)
얼어붙은 강물 위에 청년은 연인의 이름을 새긴다. 스타카토의 리듬은 얼음 위의 그 고독한 작업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 딱딱한 얼음으로 너 자신을 뒤덮은 채, 차갑게 꼼짝도 않고 강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너를 덮어 버린 얼음에 날카로운 돌로 새기련다, 그리운 이름과 그 날 그때를 …… .”


8. 회고 (Rückblick)
연인이 사는 거리에서 재빨리 도망치려고 하면서도 마음은 거기 머문채 떠나지 못한다. “얼음과 눈 위를 걷고는 있으나 내 발바닥은 타오르는 것만 같다. 거리의 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숨조차 쉬려하지 않았다. 돌에 차이며 오직 거리를 떠나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즐비한 지붕 위에서 내 모자 위로 까마귀가 눈덩이와 우박을 던졌다. …… 그 날의 일이 되살아나면 나는 한 번 더 뒤돌아보고 싶어진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집 앞에 말없이 지켜 서 있고 싶어진다.”


9. 도깨비 불 (Irrlicht)
연인의 기쁨도 슬픔도 모두 도깨비 불(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바위 틈새 깊숙이 도깨비 불이 나를 이끌어 들인다. 나가는 길을 찾는 일 따위는 내게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쯤은 이제 익숙하다, 어차피 어느 길이든 그 목적지로 가게 마련이니까. 내 기쁨도 슬픔도 모두 도깨비 불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10. 휴식 (Rast)
청년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잠시 쉰다. 그러나 몸이 편하니까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다. “간신히 나는 스스로의 피로를 깨닫고 몸을 눕혀 쉬기로 했다.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은 나를 몰아세워 험난한 길을 줄곧 걷게 했다. …… 마음이여, 투쟁과 폭우 속에서는 그토록 사납고 저돌적이던 너까지도, 지금 이렇듯 고요 안에 잠기면 뜨겁게 달아올라 돌진하는 용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11. 봄날의 꿈 (Frühlingstraum)
‘보리수’나 ‘회상’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회상이 주도한다. 이윽고 그 회상을 엄연한 현실이 깨뜨려 버린다. “나는 꿈꾸었다, 5월에 활짝 피는 갖가지 싱그러운 꽃을. 나는 꿈꾸었다, 즐겁게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들판을. 이윽고 닭 울음 소리에 두 눈을 떴다. 둘레는 춥고 어둡다, 지붕 위에서는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허나 저 유리창에 나뭇잎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꿈꾸던 사람을 비웃을까, 한겨울에 꽃을 본 그 사람을? 나는 꿈꾸었다, 오직 사랑만을, 아름다운 소녀를, 뜨거운 마음과 입맞춤을, 기쁨과 행복을 …… .”


12. 고독 (Einsamkeit)
밝은 세상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워 차라리 모진 태풍을 편하다고 한다. “전나무 가지 끝에 부드러운 미풍이 스치면, 맑은 하늘에 음울한 구름이 지나간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 길을 간다, 밝고 행복한 세상 삶을 스치고 지나 외롭게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이. 아, 이 고요한 대기여, 밝은 세상이여! 태풍이 휘몰아칠 때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다.”


13. 우편마차 (Die Post)
말 발굽 소리와 호른의 메아리는 우편마차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연인의 소식을 기대해 보지만 결국 덧없는 소원이었음을 깨닫는다. “길 거리에서 우편마차의 나팔 소리가 울려 온다, 어째서 이다지도 설레는가, 내 가슴이여? 우편마차는 너에게 편지 따위를 가져오지 않는다, 어째서 까닭없이 두근거리는가, 내 가슴이여? 그래, 우편마차는 그 거리에서 왔다, 내 사랑하는 이가 사는 곳, 내 가슴이여! 우편마차를 한번 보고 싶은가, 그곳 사정을 듣고 싶은가, 내 가슴이여?”


14. 백발 (Der greise Kopf)
서리 맞은 머리가 하얗게 백발 노인처럼 보여 오히려 잘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머지않아 서리가 녹아 버리고 검은 머리로 돌아오면 괴로움은 더 커진다. “서리가 내 머리에 흠뻑 내려 백발을 만들었다, 나는 노인이 되었다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허나 어느덧 다 녹아 버리고 본래의 검은 머리로 돌아왔다. 젊음이 나를 괴롭힌다, 아직 무덤까지는 얼마나 먼가! ……”


15. 까마귀 (Die Krähe)
까마귀의 단조롭고 을씨년스러운 비상은 청년의 불길한 운명을 상징한다. “그 거리를 떠날 때부터 줄곧 한 마리 까마귀가 나를 따라온다. 언제나 떠나지 않고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까마귀여, 괴이한 까마귀여, 나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가? 머지않아 네 먹이로 내 송장을 뜯고 싶은가? 그래, 지친 나그네 길도 그리 오래 가지 않으리니, 까마귀여, 끝까지 따라와 내 마지막 날 무덤에서 너를 보게 해다오.”


16. 마지막 희망 (Letzte Hoffnung)
바람 속에 떨고있는 마지막 나무 잎새. 음악적 묘사가 감동적이다.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단풍 든 잎이 남아 있다. 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희망을 걸고 잎사귀 하나를 지켜본다. 바람이 찾아와 그 잎과 노닐면 나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떤다. 아, 그 잎이 땅 위에 낙엽지면 내 희망도 따라 떨어진다. 나 또한 대지에 몸을 던져 희망의 무덤에서 운다.”


17. 마을에서 (Im Dorfe)
한밤중에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는 마을 앞을 지나가는 청년의 고독한 모습이 ‘안녕히 주무세요’의 가락과 겹친다. “개가 짖고 사슬이 울린다.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 채, 평소 지니지 못한 갖가지 것을 꿈꾼 뒤, 좋건 싫건 원기를 되찾는다. 다음날 아침이면 모두 사라진다. 이제 그들은 분수껏 즐기고 나머지 소망은 잠자리 속에서 찾기 바란다. 잠 이룰 줄 모르는 개여, 나를 짖어 내쫓으라! 이 잠의 시간에 나를 쉬지 못하게 해다오. 온갖 꿈을 다 꾸어 본 내가 잠든 사람들 틈에서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


18. 폭풍의 아침 (Der stürmische Morgen)
폭풍이 휘몰아치는 아침의 흉흉한 풍경은 청년의 덧없는 반항을 나타낸다. “폭풍이 하늘의 휘장을 사납게 찢어발기는 모습을 보라! 힘없이 버둥대며 구름이 펄럭인다. 구름을 뚫고 빨간 불길이 번뜩인다. 이야말로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아침이라 부르리라! 내 마음은 하늘에 그린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 – 그것은 차갑고 거친 겨울의 모습일 뿐이다.”


19. 환상 (Täuschung)
‘도깨비 불’과 비슷하며 현실에 대한 절망은 마약처럼 환상을 불러낸다. “친숙한 한 줄기 빛이 내 앞에서 춤을 춘다. 그 빛을 여기저기 뒤쫓는다. 기꺼이 지켜보며 뒤따르다 문득 깨닫는다, 빛이 방황자를 현혹하고 있음을. 아, 나처럼 비참한 자는 그 즐거운 (빛의) 환상에 기꺼이 순응한다. 얼음과 밤과 공포 저편에 즐겁고 따뜻한 집을 보여준다. 거기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 거짓 환상만이 내 유일한 차지이다!”


20. 푯말 (Der wegweiser)
보행 리듬이 죽음의 길을 향하는 어두운 발길을 연상시킨다. “어째서 나는 다른 나그네들이 택하는 길을 피해, 눈 덮인 바위 산의 은밀한 오솔길을 찾는가? …… 푯말이 거리의 방향을 가리키며 길가에 서있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방황을 계속한다. 휴식처를 찾아 쉴 사이 없이. 문득 내 눈앞에 꼿꼿이 서 있는 푯말을 하나 본다. 거기 내가 가야할 길이 있다, 누구 하나 돌아온 사람이 없는 그 길이 …… .”


21. 숙소 (Das Wirthaus)
‘숙소’는 무덤을 가리킨다. 괴로운 현실에 비해 얼마나 아늑한 안식처인가! 그러나 그 안식처도 그를 순순히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길이 나를 무덤으로 이끌어 갔다. 여기 머물러야 겠다고 홀로 마음 속에 생각했다. 초록빛 조화는 지친 나그네를 차가운 여관으로 인도하는 간판인 셈이다. 허나 나는 지쳐 쓰러져 죽을 지경이건만, 이 여관에는 남은 방이 없단 말인가? 오 무정한 주인이여, 나를 거절하는가? 그럼 다시 길을 떠나야지, 나를 더욱 멀리 이끌고 가 다오, 충직한 내 지팡이여!”


22. 용기 (Mut!)
청년은 살아갈 기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나, 곡의 장조와 단조의 교체가 마음의 불안을 드러내고 만다. “눈이 얼굴에 불어 닥치면, 나는 그것을 쓸어 내겠다. 가슴 속에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리면, 밝고 유쾌하게 노래하리라. 마음이 말하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 나는 두 귀를 막고 있으련다. 마음이 뇌까리는 탄식을 아랑곳하지 않겠다, 탄식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니까. 기꺼이 이 세상에 뛰어들어, 온갖 비바람에 맞서리라! 이 땅 위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야지.”


23. 환영의 태양 (Die Nebensonnen)
삶의 마지막 언덕을 넘어갈 때 비쳐드는 듯한 아련한 빛의 따뜻함과 죽음에 대한 친밀감이 자욱이 감돈다. “나는 하늘에 뜬 세 개의 태양을 보았다, 오랜 동안 지그시 지켜보았다. 그들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머문 채, 마치 내게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대로 있었다. 야, 너희는 나의 태양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비춰 주렴! 얼마 전까지 나도 세 개의 태양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좋은 두 개는 이미 저물어 버렸다. 저 세 번째 태양마저 뒤따라 사라져 준다면! 차라리 어둠 속이 내게는 훨씬 편하련만 …… .”


24.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라이어는 깊은 삶의 우수와 체념을 울려주고 있다. 가눌 길 없는 절망의 막바지에서 늙은 악사와 청년의 허무감은 드디어 하나가 되어 지친 자들의 새로운 생에 대한 동경과 공감의 세계를 발견한다. “마을 저편 어귀에 라이어를 켜는 사람이 서 있다. 언 손가락으로 열심히 라이어를 돌리고 있다. 얼음 위를 맨발로 이곳저곳 비틀거리며 찾아다니고 있으나, 그의 작은 접시는 빈 채로 있다. 누구 하나 들으려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다. 저 노인 둘레에서는 개만 으르렁거릴 뿐이다. 허나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에 맡긴 채, 라이어를 돌린다, 결코 멈추는 일 없이. 야릇한 노인이여,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 노래에 맞추어 라이어를 돌려 주지 않겠습니까?”


□  그 누구도 이해 불가능했던 슈베르트의 절망적인 고독

사실 이토록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가곡집도 드물다. 슈베르트가 가곡집을 반쯤 썼을 때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려 들려준 일이 있었다. 언제나 그의 새 작품을 듣고는 반기던 친구들도 그 때만은 내용이 너무 어두어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머지않아 자네들도 이 곡이 좋다는 걸 알게 될거야.” 하며 대단한 자신감을 내비쳤다고 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만년의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에 대한 깊은 공감을 자신의 노래로 승화시키려 했다. 그 누구도 참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던 슈베르트의 절망적인 고독은 이 가곡집 도처에 배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저민다. 차가운 하늘 밑, 마을 어귀의 길에 선 채 얼어붙은 손으로 라이어를 돌리며 동냥을 구하고 있는 늙은 악사를 노래한다. 이 노인에게 따뜻한 친근감과 동정을 느끼며,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 노래에 맞추어 라이어를 돌려 주지 않겠습니까?”하고 간청하는 호소로 가곡집 전부가 끝난다.

                                                       - 작품해설 안동림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