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로 줄리아니는 모렛티, 카룰리, 카르카시 등 이탈리아 악파 중 가장 유명했던 거장이다. 1781년 이태리 바리에서 태어난 마우로 줄리아니는 정식 음악교육으로 대위법과 첼로를 공부했으나, 곧 기타에 흥미를 가졌다. 독학으로 배웠지만, 단시일내 당대의 가장 탁월한 기타리스트가 될 정도로 기타라는 악기를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당시 이태리에서는 오페라가 성행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을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어,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다녔으며, 결국에는 음악의 중심부인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었다. 거기서 그는 연주자와 작곡자로써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일련의 대 작곡가들 - 훔멜, 스포어, 디아벨리 등 - 중의 한사람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베토벤이 그를 위해 몇곡의 기타 소품을 작곡했으며, 그는 1813년 베토벤의 제 7 번 교향곡 초연시 첼로를 연주했었다. 러시아를 방문하고나서, 1819년 빈을 떠난 줄리아니는 나폴리로 돌아와 1829년 눈을 감았다. 당시 줄리아니의 죽음에 애도를 금치 못했던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줄리아니가 울려주는 음색은 기타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순수한 것이다. 그의 손에 기타가 쥐어지면 금방 음은 살아 움직이듯 느껴지거나 빛나며 혹은 흐느껴 운다. 그는 느린 악장의 아다지오를 같은 스타카토의 악기인 피아노와 틀리게 멋진 가락의 흐름으로 노래하며 화음을 교묘히 엮어 나간다. 물론 이러한 점은 기타라는 악기가 본래의 특성으로 갖고 있는 독특한 것인지도 모르나 다시금 줄리아니의 끊임없는 연구와 풍부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그 특성을 충분히 나타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줄리아니는 기타를 노래하도록 한 것이다."

줄리아니가 기타를 위해 남긴 작품은 아주 대단한 분량이어 200곡이 넘는다. 기타 독주곡, 기타 실내악곡, 그리고 3개의 협주곡 등이 그것이다.

19세기 초, 비엔나에서는 공공연주회가 뿌리깊이 정착이 되었기 때문에 연주자의 재능과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협주곡 연주가 큰 도구로 작용했었다. 줄리아니의 협주곡 A장조 op.30(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3개의 협주곡 중 첫번째 작품)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대규모 관현악과 기타를 위해 작곡되어진 이 작품은 모차르트에 의해 정립된 3악장 구성의 고전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본다면 아주 낭만적 요소를 지니 고 있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갖는 간결한 구성보다는 차라리 훔멜, 베버 및 롯시니에게서 느낄 수 있는 하모니와 멜로디를 구사하고 있다.

1808년 4월 3일 레두덴살 아카데미에서 줄리아니의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A자오 op.30>이 초연되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그날 기타로 직접 연주했다.

이 연주장에는 청중의 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있었다. 악성 역시 줄리아니 기타에 도취되어 열광했고 또 "기타는 그 자체가 작은 오케스트라이다"라고 극찬했다 한다.

음악평론가 구스타프 쉴링(Gustav shilling)은 그날 연주평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줄리아니는 매우 비상한 기타 테크닉을 지녔다. 그의 음색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활약하는 기타리스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거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