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최고의 기타음악 작곡가 후아퀸 로드리고 ]

로드리고의 기타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기타를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칭송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의 기타 협주곡들은 어느 악기보다도 부드럽고 어느 악기보다도 강렬한 힘으로 청 중들을 매혹시킨다. 한동안 기타하면 세고비아를 떠올렸던 적이 있다. 세고비아가 기타연주 의 대명사라면 기타음악 작곡의 대명사는 로드리고이다. 모 방송의 주말의 명화 시그널로 수십년간 사용하고 있는 아랑훼즈 협주곡은 로드리고를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린 1등 공신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타곡이기도 하지만 팝과 클래식을 아울러 당대의 기라성 같은 연주가들이 빼놓지 않고 연주하는 곡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로드리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전세계는 물론 국내에서도 그를 기리는 축제가 이어질 것이다.

로드리고는 1901년 11월 22일 스페인 동부지방 발렌시아의 사군토에서 10형제 중 막내로 태 어났다. 특출한 음악 재능을 예고하듯이 그는 음악을 수호하는 성인 세실리아의 날에 태어 났다. 로드리고는 어린 나이에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1905년 사군토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던 디프테리아가 마을을 휩쓸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다행이 로드리고는 회복되었지만 시력에 치명적인 손상이 남아 거의 실명상태에 빠졌다. 나중에 홍채 이식수술 등 여러 번의 수술 끝에 가까스로 아주 밝고 화려한 색깔 정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로드리고는 성인이 된 후에 각막이식 수술을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이것이 화근이었다. 의사는 시력이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3주일 후 녹내장이 심해져 영원히 시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네살 때 로드리고 가족은 발렌시아로 이주했다. 7세 때 로드리고는 시각장애아 특수학교에 서 교육받았다. 그는 문학과 음악에 일찌감치 특별한 발전을 보였다. 시각을 잃은 대신 음악 세계에 더욱 밀착하게 되어 어려서부터 음악에 비상한 관심과 정열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점자를 통해 일반과목과 함께 피아노와 음악도 공부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음악교사들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발렌시아에서 로드리고 가족들은 아폴로 극장에서 자주 공연을 관람했으며 어린 로드리고는 공연에 수반한 음악에 각별히 이끌렸다. 특히 리골레토를 처음 들었을 때 음악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게 되었고 16세 때 음악의 길을 결심했다. 로드리고는 비록 등록을 할 수는 없었지만 발렌시아 콘서바토리에서 프란시스코 안티츠라는 선생님으로부터 화성과 작곡법을 배웠다.

그러나 완고했던 아버지는 그가 음악 공부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버지는 무척 거친 분이 어서 형제들 모두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나는 매우 유순한 아이였고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걸 원치 않으셨다. 더더군다나 음악공부는 질색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 을 딱 한번 거역했는데 결국은 신에게 감사할 일이 됐다. 아버지의 반대가 걸림돌이기는 하였지만 이후 로드리고의 음악 여정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로드리고는 안티츠 밑에서 음악을 배우며 몇 개의 관현악 곡을 썼는데 1924년 첫작품 음유시인이 발렌시아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됐다. 부모님은 그 음악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부모의 후원 없이 빠른 속도로 명성을 쌓아나갔다. 1925년 초연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어린시절을 위한 5개의 소품에는 엄청난 갈채가 쏟아졌다.

로드리고는 일찌감치 성공의 길에 올라섰지만 가야할 길은 멀었다. 스승과 조언자들은 그에 게 음악 세계가 더 넓어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음악인 알베니스, 그라 나도스, 마누엘 데 파야 등이 그랬듯이 로드리고는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1927년 26살의 로 드리고는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로 유명세를 타던 작곡가이자 믿음직스런 교사 폴 뒤카의 작곡 교실에 등록했다. 로드리고는 곧 뒤카의 촉망받는 제자가 되어 5년간 배웠다. 로드리고는 따스하고 순수한 정열과 지중해의 목가적인 생활습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이 그의 음악에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와 열정, 자유분방함은 작곡가로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서 의심 많고 재치 있고 세련된 뒤카는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뒤카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 한편 로드리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함에는 브레이크를 걸었다. 뒤카는 로드리고가 작품을 발표할 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부유한 후원자들을 소개해 저택에서 몇몇 작품을 초연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로드리고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모리스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음악가들 과 두루 만남을 가졌다. 특히 뒤카의 소개로 불의 춤이라는 강렬한 곡으로 오늘날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겨놓은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를 만났다. 50대에 접어든 파야의 조언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독특한 음악세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던 1920년대 말에서부터 193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은 파야의 격려 속에 만들어졌다. 1933년 로드리고는 빅토리아 캄히와 결혼을 하고 잠시 스페인에 머물렀다. 로드리고는 활발한 활동으로 프랑스에도 서서히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그는 마드리드 맹인대학 교수에 임명됐지만 거절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파야의 주선으로 파리의 장학생으로 2 년간 더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로드리고는 참혹한 내전 기 간 동안 에스파냐를 떠나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파야 덕분이었으며 그렇지 않았다 면 내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으로 국가 장학 금 지급이 중단되었고 아내의 부모가 로드리고 부부의 생활을 보살폈고 아내는 악보필사 일 을 했다. 로드리고는 잠시 파리에 머물다가 프라이부르크, 잘즈부르크 등지로 다녔고 그 동안 음악은 날로 성숙을 더해갔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신이 서자 비로소 필생의 대표작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1938년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아랑훼즈 협주곡에 착수해 착수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인 1940년 말에 완성해 바르셀로나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곡은 반 세기가 흐른 지금도 인기가 식지 않을 만큼 시대를 앞선 곡이었다.

로드리고 부부는 다시 마드리드에 정착했고 이후 로드리고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높아갔다. 그의 음악은 세계 곳곳에서 갈채 속에 연주됐으며 로드리고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프랑스정부는 레종도뇌르 십자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프랑스의 문학예술상 수상자로 선정했 고 1991년 후앙카를로스 국왕은 아랑훼즈 정원의 후작을 내렸다. 로드리고는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즈와 줄리앙블림, 첼리스트 줄리앙 로이드 웨버,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 등 현재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연주가들과의 작업을 통해 대중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로드리고는 수많은 주옥같은 곡들을 만들어냈는데 독주악기를 위한 것이든 전체 오케스트라 를 위한 것이든 자신의 악보는 모두 점자로 찍어내고 그 다음에 필경사에게 구술을 해 옮긴 다음 비로소 악보로 만들었다. 마음으로 들은 것을 오선지 위에 점자로 일일이 찍어내야 하 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힘겨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휘파람으로 아랑훼즈 협주곡를 아내에게 불러주고 이를 다른 사람이 모음 악보로 만든 것이 아닌가라고 의구심을 제기했을 때 로드리고는 몹시 불쾌해했다. 로드리고는 기타에도 능숙하지 못하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얼리니스트이지만 기타로는 네 개의 음을 연달아 칠 수조차 없을 만큼 문외한인 그가 기념비적인 기타곡들을 무수히 작곡해 냈다는 사실은 놀랍다.

로드리고는 1997년 7월 21일 뗄래야 뗄 수 없는 소중했던 동반자 캄히를 떠나 보냈다. 그로 부터 정확히 2년 후 7월 6일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한 위대한 작곡가는 마드리드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 로드리고를 도운 사람들 ]

로드리고가 위대한 음악가가 된 이면에는 헌신으로 도움을 주었던 두 사람이 있다. 그 하나 는 라파엘 이바네스로 그는 로드리고의 일거수 일투족을 거들었던 아버지의 고용인으로서 로드리고가 내게 눈을 빌려준 사람이라 칭했을 만큼 수년 동안 악보 필경사 역할을 하며 로드리고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일을 했다. 한편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음악의 깊이가 한층 무르익어 가던 1928년 로드리고는 터키계의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캄히를 만난다. 캄히는 한 집시로부터 이름이 JO자로 시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 예언을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어느날 그녀는 로드리고의 소품 아침 수탉의 전주곡을 우연히 접했다.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었지만 연습 끝에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뒤 친구 알렉산데르 데메트리아드가 친구의 부탁이라면서 편지 한 통을 들고와 독일어로 번역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번역을 부탁했던 이가 다름 아닌 로드리고였다. 그녀는 기쁨에 들떠 데메트리아드에게 로드리고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다. 빅토리아는 일찍이 익혀 놓은 로드리고의 전주곡을 연주했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집시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부모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1933년 결혼식을 올렸다. 로드리고는 아내를 일컬어 삶과 굶주림, 일과 영광을 나와 함께 나눴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