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클래식기타의 아버지 타레가

기타는 악기사상 가장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진 발현악기이며 비엘라(Vihuela)→류트(Lute)→기타(Guitar)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량, 보급되어 16세기경부터 기타음악은 시인 에스피넬(V.Espinel), 의사 아마트(J.C.Amat)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코르베타(F.Corbetta), 산즈(G.Sanz), 드.비제(R.de Visee) 등에 의해 더욱 찬란한 전고전시대를 형성하였으나 바이올린 등 궁현악기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타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레티(Moretti), 아구아도(D.Aguado) 등에 의하여 기타음악이 재현되면서 소르(F.Sor), 쥴리아니(M.Giuliani), 카룰리(F.Carulli), 카르카시(M.Carcassi) 등이 계속 출현하여 기타음악은 제1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금기 이후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피아노의 발달과 오케스트라의 확대, 바그너에 의한 오페라의 부흥으로 기타음악은 역사상 가장 쇠퇴현상이 일어나면서 기타는 단지 노래와 춤을 위한 반주나 일반 대중들의 오락악기로서 다루어져 왔다. 예컨대 슈베르트는 피아노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가곡의 반주로 피아노 대신 기타를 대용으로 쓰곤 했던 것이다. 그후 많은 관심있는 음악가들이 기타의 연주법의 개발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타는 대규모 연주홀에 부적합하다는 근본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으며 기타 음악의 작곡도 그 기술적인 화려한 면에 늘 묶여 깊이 있는 곡이 나오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이 때 스페인에서는 현대 기타음악의 시조이며, 기타의 로만시대를 장식한 거봉이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은 프란체스카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가 1852년 11월29일 스페인의 바렌시아주 카스텔론의 빌라레알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레가는 8세 때 맹인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곤잘레스(M.Gonzales)에게 최초로 기타지도를 받고 이어 훌린안 아르카스(Fulian Arcas), 토마스 다마스(T.Damas)에게 사사하였다. 타레가는 한 후원인의 도움으로 바렌시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리아나로 가서 기타교수 생활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아나의 재벌을 만나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75년에는 콩쿨에서 1등을 획득했으며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그 후 타레가는 기타리스트로서 마드리드에 데뷰한 후 스페인은 물론 런던, 파리, 스위스 등을 연주여행 했으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기타에 관한 일관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공부한 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부터였다. 기타의 어떤 모습도 타레가가 이 악기로부터 회의를 품도록 만들지 못했다.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타레가는 그곳 알함브라극장에서 기타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가졌으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전국 주요도시의 순회 연주회에서 타레가 특유의 신선하고 독특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881년에는 파리, 런던 등지에서 연주, 귀국후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가졌고 결혼하여서는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다. 타레가는 겸손, 온화, 학구적인 성격으로 그는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멀리하는 한편 기타 예술의 탐구를 위한 엄격한 수도자의 생활을 하였다.

타레가가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일부는 기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더욱 맑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과 기타의 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준 것, 그리하여 복잡한 악곡들도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이 모든 업적은 기타의 주법 개발과 기타의 디자인 혁신으로 인해 가능했다. 타레가는 음색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위해 손을 댄 작품으로는 기타자체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과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그리고 바그너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편곡작품이 있다. 이 위대한 기타음악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단한 개성과 스페인의 철저한 향토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투리나(Turina), 토로바(Torroba), 팔라(Falla), 빌라로보스(VillaLobos)로 이어지는 스페인 음악의 첫주자였다. 단순하고 명상적인 <전주곡>은 Lagrima(눈물)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주르카의 두 제목은 여자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은 틀림없이 음악에 비추어져 있는 듯 싶다. "13개의 전주곡", "알람브라의 회상", "아라비아 기상곡" 등 작곡, 편곡을 합해 300곡이상의 걸작이 있다.

타레가는 젊었을 때부터 지병인 안질로 계속 번민해 오다가 중풍이 발작하여 1919년까지 고생하던 끝에 그해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서거하였다. 타레가는 생애의 반을 손톱을 사용한 주법으로 연주했으나 자신의 손톱에 결함이 생겨 손톱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수개월간 연구끝에 개발하여 그후로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손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레가의 직계문하인 에밀리오 푸홀(E.Pujol 1886~ 스페인)은 타레가가 손톱없이 연주하게 된 원인은 타레가 자신의 손톱에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살이외의 불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여 탄주하는 것보다 신경과 직결될 수 있는 살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타레가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지금의 기타는 진로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타레가는 종래의 기타연주나 작곡에서 철저한 개혁을 하였으며 아구아도 주법을 떠나 기타연주 기법의 백지상태에서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연구, 개척하였다.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또는 음색, 음량의 풍부한 변화와 화음의 확충등, 수많은 업적은 우수한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20세기 기타 르네상스를 낳게 하였다. 금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스페인의 저명한 음악가 루이스 미류트는 타레가를 찬양하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작곡가로서의 타레가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타의 진짜 위대한 면을 발견해낸 것은 타레가라고 생각한다."
현재 타레가의 유해는 출생지인 카스텔론에 안장되어 있으며 프라아나에는 타레가 일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