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Tchaikovsky, Violin Concerto D Major Op. 35)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에서 결혼의 상처(1877년 여름에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석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를 달래고 있었다. 3월 14일, 자신의 제자였던 요시프 코테크가 찾아왔다. 그 때는 차이코프스키가 한창 [피아노 소나타 G장조]를 작곡하던 시기였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의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리고 차이코프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타는 영감으로 써내려간 바이올린 협주곡
며칠 후, 메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은 작곡하는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하루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런 식의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코테크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차이코프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던 인연으로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왔다.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 것도 코테크를 통해서였고, 차이코프스키는 코테크를 위해 [왈츠-스케르초]를 작곡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깊었다. 마침내 4월 4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여전히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두 달 후 [명상곡]으로 출판된다)을 버리고 하루만에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4월 11일에 악보의 초고가 나왔다. 차이코프키가 [4번 교향곡]과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을 막 끝냈을 때였다. 출판은 모스크바의 표트르 위르겐슨이 맡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보는 1879년 8월에 나왔다.

 

 

연주 불가능, 바이올린을 모르는 작곡가라는 잘못된 평가
초연을 향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 연주자로 경력이 많지 않았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878년 10월, 차이코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의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하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을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유명한 비르투오조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초연의 실패와 혹평, 성공을 향한 집념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하게 된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중략)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 째 하루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적으로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테오도르 헬름),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막스 칼베크).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하는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이폴리트 알타니의 지휘와 브로드스키의 협연으로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1악장 - Allegro moderato
조용한 서주와 함께 두 개의 주제가 제시되는데 여리게 도입 선율을 연주하고 10마디부터 제1주제를 다시 연주한다. 그리고 바이올린 카덴차가 연주되는데, 대단히 화려한 특징이 있다.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파워는 차이코프스키의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에 힘입어 폭발적인 파워를 느끼게 한다. 중요한 점은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독주 사이의 미묘한 균형인데, 차이코프스키는 기교적인 카덴차와 질주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대비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급의 작곡가였다. 

 

2악장 - Canzonetta Andante
관악기의 서주가 흐른 후 서정적인 주제를 바이올린이 노래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감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음색 조절은 연주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3악장 - Finale Allegro Vivacissimo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어택과 함께 16마디부터 37마디까지 바이올린 카덴차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러시아의 민속 춤곡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3악장은 서정성과 격정 그리고 탄식과 희망 사이를 교차하고 있다. 5도음정의 관악기들과 함께 제2주제가 시작되는데 활발하게 움직이는 독주 바이올린은 절망과 희망을 교차하면서 감정의 등고선을 자극한다.

 

                                                                                                           - 글 김효진 / 월간 <라 뮤지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