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 피킹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어떠한 감정일지라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공전절후의 피킹솜씨에 의한 하이테크 속주를 구사하는 폴 길버트는 1966년 11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카본데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타리스트를 지망하는 아마추어의 꿈의 전당이라 할 ‘GIT(Guitar Institute Of Technology)’에 입학해 이론적인 면과 테크니컬한 면 모두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이미 15살의 나이에 마이크 바니의 귀를 놀라게 해 기타 플레이어지에 소개될 정도로 그의 기타실력은 뛰어났었다.

GIT 졸업 후에는 기타 강사로서 활동하며 GIT 동문인 기타리스트 브루스 부옛과 그룹 Racer X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레이서 X 해산 후에는 초고속 베이시스트이며 실험적인 태핑 기술들을 많이 개발한 바 있는 거물 빌리 시언과 함께 Mr. Big을 결성하게 된다. 70년대의 록그룹 프리의 곡 'Mr. Big'에서 힌트를 얻어 그룹명을 딴 이들은 89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종전 레이서 X에서 추구했던 하모닉마이너 계열에서의 눈부신 클래시컬 속주와는 달리 미스터 빅에서 그는 보다 70년대적인 록스타일로 기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비록 형태는 70년대를 닮은 복고적인 것이라지만 'Addicted To That Rush' 등에서처럼 첨단 기교와 맞물린 프레이즈라 록기타계에선 그의 변신을 또 다른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2집 [Lean Into It]에선 전기 드릴에 의한 기타솔로-'Daddy, Brother, Lover, Little Boy'-도 들려준 바 있는데, 이 때문에 에드워드 밴 헤일런과 폴 사이에‘과연 드릴연주를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라는 가벼운 마찰이 일기도 했다.

미스터 빅 해산 후에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해 앨범제작 및 활발한 공연활동을 하며 경쾌한 로큰롤에 더욱 관심을 두는 음악세계를 들려주고 있다. 폴 길버트는 ‘초인적’이란 표현을 써도 전혀 무색하지 않은 기타의 달인이다. 특히 얼터네이트 피킹이란 측면에선 정확성, 힘, 스피드 등으로 볼 때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엔 하모닉마이너 등 소위‘스케일 프레이즈’로 대표되는 속주를 즐겨 구사하다가 미스터 빅으로 오면서 블루지한 필을 가미시킨 복고적인 맛의 기타를 보여주었다. 그는 테크닉에 있어서만은 불가능을 모른다. 192cm나 되는 장신이라 그런지 손가락 또한 무척 길어 어떠한 와이드 스트레치도 쉽게 구사한다. 뿐만 아니라 피킹과 핑거링을 요소 요소에서 필요에 따라 능란히 배치해 주법적인 측면에서 솔로 플레이즈를 무척 현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반복적인 라인일 경우 그는, 한번은 얼터네이트 피킹에 의한 타이트하고 정확한 스피드로 그리고 또 한번은 핑거링만에 의한 부드러운 레가토 프레이즈로 연주함으로써 같은 라인이라해도 전혀 다른 느낌과 뉘앙스를 표현해낸다. 이러한 것은 헤비메틀 및 블루스 기타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 이 때문에 그가 연주한 블루스 곡들은 ‘전통적’인 필이라기 보다는’하이테크’블루스가 대부분이다. 지미 헨드릭스에게 바치는 [Tribute To Jimi Hendrix]를 들어보면 폴 길버트의 연주는 스탠더드가 아니라 고도의 초절기교 위에 펼쳐지는 하이테크 블루스라는 걸 알 수 있다.

너무 헛점이 없이 완벽한 기교를 구사하므로 혹자는 ‘인간적인 면이 결여되었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기타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방법적 기술적 도전의 상징으로서 평가된다. 록기타의 표현력이란 측면에서 이 슈퍼맨의 출현은 ‘충격’ 또 ‘충격’인 것이다.

                                                                                - 음악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