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연주는 곧 진실(Truth)을 말하는 것이다.”

블루스 기타의 거장 B.B. King-B.B.는 Blues Boy의 약어-은 1925년 9월 16일 미국 미시시피주의 이타베나에서 태어났다. 교회에서 노래를 하던 어머니-그러나 그녀는 블루스 음악을 천한 것으로 여겼다-와 역시 가수였던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는 빈 담배깡통 등에 철사를 붙인 기타 장난감을 만들어서 기타연주 흉내를 내곤 했다.

그가 처음 기타를 입수하게 된 것은 14세 때 교회목사로 있던 삼촌 때문이다. 삼촌을 통해 기타의 기본을 익힌 그는 텍사스의 컨트리 블루스 맨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Blind Lemon Jefferson), 로니 존슨(Lonnie Johnson), 라이트닝 홉킨스(Lightin’Hopkins), 부카 화이트(Bukka White) 등을 들으며 기타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42년 T-본 워커의 블루스 기타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를 목표로 열심히 기타를 치게된다.

47년 그는 멤피스로 가 활동하다 이듬해엔 멤피스 라디오 방송국 WDIA에서 DJ를 하면서 그의 이름이 조금씩 퍼져갔다. 이후 49년에 첫 레코딩을 하였고 50년부터 본격적으로 녹음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그는 가스펠적인 창법과, 기타와 호응하는 밴드 어레인지, 표현력 강한 기타연주로 좋은 반응을 얻어갔다. 그리고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엽에 그 인기는 절정에 달해 'Sweet Sixteen', 'Rock Me Baby', 'Five Long Years' 등의 빅 히트 작을 낳았다.

62년에는 대기업 ABC 파라마운트와 계약을 해 B.B. King 일생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고, 65년엔 시카고의 리갈극장 라이브를 통해 당대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명연을 들려주었다. 70년대로 들어와서도 그는 'The Thrill Is Gone'(70) 등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했으며 스트링스가 가미된 보다 팝적인 성향의 블루스 음악을 만들어 갔다. 그외 알버트 킹과의 조인트 콘서트 및 U2와의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현재에도 짬을 내 컴퓨터 공부를 하는 등 정력적인 생을 살아가고 있다.

B.B. King의 기타는 한음 한음을 중요하게 연주해 가는 블루스 기타의 전형이다. 음의 강약을 조절해 가는 미묘한 컨트롤이나 3연감각, 그리고 벤딩기술의 독특함 등은 타 기타리스트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비브라토 역시 흐느끼는 듯한 프레이즈와 감칠맛 나는 면이 교묘히 배합돼 있어 그때그때 흐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그는 일렉트릭 기타 사상 자기내면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연주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Rock Me Baby'에서의 능숙한 반음초킹과 3연 프레이즈 필, 'Lucille'에서의 따뜻하고 깔끔한 톤, 'The Thrill Is Gone'에서의 아름다운 마이너 펜타토닉, 'Inflation Blues'에서의 훈훈한 음색 등등 그의 연주는 감동적인 설득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외에도 그는 깁슨 기타의 내추럴 톤을 가장 잘 뽑아내기로도 유명하다.

사 용 장 비
◇Gibson ES-355 TD-SVW, Gibson ES 335, Gibson ES 330 TD(Sun-burst)
◇Fender Twin Reverb, Yamaha YTA-110
◇Roland Rhythm Box TR-77




블루스의 제왕, 전설적인 뮤지션 비비킹(B. B. King, 본명 Riley B. King)은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크게 성공한 블루스 가수이자 세계적인 일렉 기타리스트로서 60년대 말의 수많은 백인 기타리스트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아티스트이다.

독특한 기타 연주 스타일인 벤트(bent)를 구사하며 컨템포러리 블루스 기타의 전형으로 추앙 받아온 비비킹은, 어떤 가사와 뉘앙스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뛰어난 표현력으로 가수로서도 51년부터 85년까지 빌보드 R&B 차트에 74곡을 올리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가스펠 음악에 몰두했던 비비킹은 블루스의 고장 미시시피 델타에서 청소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블루스의 거장 티 본 워커(T-Bone Walker), 로니 존슨(Lonnie Johnson), 재즈 천재 찰리 크리스틴(Charlie Christian), 장고 레인하트(Django Reinhardt)의 스타일을 답습했고, 약 열 달 동안 멤피스에 머물면서 컨트리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사촌 부카 화이트(Bukka White)로부터 기타 주법을 전수 받으며 재능을 키워갔다.

멤피스 라디오 방송국 WDIA에서 라이브 연주를 통해 인기를 얻게 된 그는 [The Peptikon Boy]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고, 라디오 상에서 빌 스트리트 블루스 보이(Beal Street Blues Boy)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 이름은 후에 블루스 보이라는 별칭에서 결국 '비비'로 축약된다.

49년 불릿 레코드사(Bullet Records)에서 자신의 첫 싱글 4곡을 녹음한 그는 비하리(Bihari) 형제가 운영하는 LA의 RPM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히트곡 제조기로서의 화려한 역사를 준비하게 된다.

51년 R&B 차트 넘버원에 빛나는 'Three O'Clock Blues'를 발표한 킹은 보컬리스트 바비 블랜드(Bobby Bland), 드러머 얼 포리스트(Earl Forest), 피아니스트 조니 에이스(Johnny Ace)와 홍보 공연에 나선다.
50년대에 'You Know I Love You'(52), 'Woke Up This Morning'(53), 'Please Love Me'(53), 'Whole Lotta' Love'(54), 'You Upset Me Baby'(54), 'Every Day I Have the Blues'(55), 'Bad Luck'(56), 'Sweet Little Angel'(56), 'Please Accept My Love'(58)를 비롯해 싱글 20곡으로 꾸준히 차트를 점유하며 명성을 구가한 비비킹은 62년 ABC 파라마운드 레코드사로 이적한다.

독창적이면서 공격적인 기타리스트로서의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카고 극장에서의 실황 앨범 [Live at the Regal](65)을 발표한 이후 'Don't Answer the Door'(66), 'Paying the Cost to Be the Boss'(66)로 R&B 10위권 안에 진입하며 그는 최전성기를 누린다.

69년 현악기와 마이너 키를 기조로 한 로이 호킨스(Roy Hawkins)의 'The Thrill Is Gone'으로 팝 팬들에게 어필하면서 R&B 뿐만 아니라 메인스트림에서도 큰 명성을 얻게 된다.

70년대에도 꾸준히 'To Know You Is to Love You', 'I Like to Live the Love'를 히트시키며 팝 계의 몇 안 되는 블루스 맨으로서 인기를 얻어온 비비킹은 76년 바비와 듀엣으로 활동하며 환상의 콤비로 각광을 받았고, 78년부터는 재즈인들과 함께 펑키 스타일의 'Never Make Your Move Too Soon', 'When It All Comes Down'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거리의 전사로서 1년 평균 300회의 공연을 하며 트레이드 마크인 트릴 주법과 호소하는 듯한 창법으로 장르의 논쟁을 불식시켜온 비비킹은 93년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 로버트 크래이(Robert Cray)를 비롯한 여러 블루스의 명인들이 참여한 [Blues Summit]을 발표하기도 했다.

루실레(Lucille)라 불리는 그의 오랜 음악 동반자 깁슨 기타(Gibson Guitar)로 꾸준히 연주활동과 레코딩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비비킹은 20세기 초에 선술집 등에서 시작한 자유분방하고 거친 재즈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었으며, 전후 시대 최고로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소위 음악의 친선대사로서 평가받고 있다.

                                                                         - 음악 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