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밴드의 음악은 전자기타로 된 종교음악이다. 영혼을 때려서 영혼을 열게 하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랄 수 있다.”

록 기타시대를 연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11월 27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지미 헨드릭스의 아버지는 탭 댄서였고 어머니 루실(Lucille)은 알콜 중독자였다. 이들 부모는 지미가 7살 때 헤어지고, 지미는 그 때문에 사랑이 결여된 빈곤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해야 했다. 어느 날 지미는 아버지로부터 우쿠렐레를 선물받게 되는 데 이것이 그에게 있어선 최초의 현악기와의 만남이었다.

58년에 어머니 루실이 알콜중독과 결핵으로 병원에서 사망하자 지미는 그 충격으로 더욱 음악에만 몰두하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지미는 기타연주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서 공공연히 약물을 복용해대는 문제아였고 오로지 기타만 쳐댔다. 결국 그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이후 지미는 낙하산 병으로 군에 입대했는데 여기에서도 ‘Casuals’라는 밴드를 조직해 연주를 계속하였다.

제대 후 지미는 65년까지 리틀 리처드의 보조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고, 기타리스트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미의 명성은 66년경으로 오면 더욱 높아져, 당시 명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마이크 브룸필드나 에릭 클랩튼 등에 비교되기도 했다. 이 당시 지미의 연주를 보던 사람들 가운데엔 ‘프랑스의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우던 쟈니 할러데이도 있었다. 쟈니는 지미를 보곤 자신의 파리 공연에 오프닝으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지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멤버를 찾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달려온 인물은 노엘 레딩(Noel Redding)이었다. 원래 노엘은 기타리스트로써 자리를 구하러 왔다가 지미와 한번 연주해보곤 즉시 기타를 포기하고 베이스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또한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은 노엘보다는 더욱 큰 확신과 재능을 갖춘 드러머였다.(당시 19살이었던 그는 3살 때부터 드럼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멤버를 규합한 지미는 3인조 록 트리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출범시키고 3일간의 연습을 거친 후 쟈니 할러데이의 유럽공연에 참가하였다.

공연 후 이들은 ‘Polydor’레이블과 계약하고 역사적인 데뷔작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서 지미는 충격적인 사이키델릭 하드록 기타를 들려주어 그는 금새 음악계 최고의 화제대상이 되었다. 화려한 데뷔를 장식한 지미는 계속해서 기타사에 길이 남을 걸작 앨범들을 발표해 역사상 최고의 대 기타리스트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지미는 여러 가지 악성 루머들 속에서 그룹을 해체시키고 드러머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 등과 새로운 밴드를 출범시키고 70년에 [The Band Of Gypsys]라는 데뷔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출발한 그룹 ‘밴드 오브 집시’는 지미의 죽음-70년 9월 18일 약물중독으로 사망-으로 제대로 활동도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다.

지미 헨드릭스는 명실공히 역사를 바꾼 대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흑인특유의 끈끈함이 배어 있는 블루노트 펜타토닉을 기반으로 강렬하고 공격적이며 격한, 그리곤 외로운 명 프레이즈들을 남겼다. 그의 피킹은 힘이 없는 듯 하면서도 격정적이며, 핑거링은 아무 생각 없이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정돈된 질서가 있다. 또한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답게 여러 가지 핑거 테크닉을 다양하게 구사한 바 있다.

솔로의 경우 1현에서 2현으로 프레이징 되다가도 순간적으로 아무 의미 없이 오픈코드에 의해 줄 전체를 피킹해 버리는 비형식적인 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Voodoo Chile' 등에서와 같이 커팅을 이용한 프레이즈도 즐겨 썼고, 반음튜닝에 의한 갖가지 폭발적인 벤딩과 비브라토 아밍을 구사하였다. 로버트 존슨으로부터 B.B.킹이 블루스를 넓혀갔다면, 지미 헨드릭스에 와서 그것은 프로그레시브한 모티브를 얻어 그 방법적 틀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 용 장 비
◇Fender Stratocaster, Gibson Les Paul Custom(54), SG Custom(63),Gibson Flying V(67)
◇Fender Twin Reverb, Marshall
◇Dunlop Cry Baby, Uni Vibe

글 / 조성진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는 과연 누구일까? 현재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는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이 당연하다는 듯이 꼽히고 있지만 지미 헨드릭스가 이 순번에 함께 매겨지지 않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가 이 몇대 운운하는 기타리스트에서 제외된 것은 아마도 당시 록음악계를 좌우지하던 브리티쉬 록의 권위에 눌린 그의 미국 국적과 흑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일렉트릭 기타의 '대가'로 평가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모험적이고 진취적이며 파격적인 기타리스트였던 헨드릭스는 와와 페달, 퍼즈 박스, 유니바이브 등의 장치들과 테이프 딜레이 기계를 능란하게 사용하여 가끔은 부드럽고 선율적인 사운드를 만들었으나, 흔히 고음의 사이키델릭 음향으로 우주나 수중에서의 사운드를 창출함으로써 악기의 가능성을 대폭 넓혀 주었다. 음향변조 장치나 음향재생 장치를 조심스레 통제하며 사용했던 그의 연주 방법은 70년대 모든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들을 위한 교과서가 되었으며, 마일즈 데이비스 같은 재즈 연주자들로 하여금 록적 요소들을 받아들이도록 고취시켜 소위 '퓨젼(fusion)'이라는 새로운 쟝르를 탄생케 하였다.

왼손잡이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왼손잡이용이 아닌 보통의 기타를 사용하여 거꾸로 들거나 혹은 뒤로 들고 연주하는 등 뛰어난 쇼맨쉽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머리나 등뒤로 기타를 돌려 연주하거나 공격적인 자세로 몸을 구부리거나, 외설적인 자세로 연주를 하는 옛 연주자들의 테크닉을 재현함으로써 그는 록계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68년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에서의 연주로 미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그는 록계 최초의 흑인 수퍼 스타로 탄생했다.

69년 익스피리언스(Experience)가 해체된 후 대중들의 시야에 나타나지 않던 그는 그해 8월에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해 일렉트릭 기타로 미국 국가를 연주한다. 이 연주는 과거와 현대의 미국문명이 지닌 난폭성을 로켓과 폭탄의 음향으로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커다란 동요와 논란을 일으켰었다.

70년 초에 잠시동안 지속되었던 밴드인 밴드 오브 집시즈(Band of Gypsys)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공연 및 녹음 활동을 하였고, 8월에 와이트 섬에서 개최된 페스티벌에 출연하기 직전에는 뉴욕시에서 일렉트릭 레이디랜드(Electric Ladyland)라는 자신의 스튜디오 녹음실을 개설하였다. 현대 인스트루멘틀 음악의 영역을 넓히는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존 맥로린과 같은 전위파 재즈 뮤지션들과의 녹음을 위해 무려 8백여 시간을 소비하며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현대 록음악을 융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안타깝게도 70년 9월 18일 위업을 달성시키지 못한 채 타계하고 말았다.

[프로필] 지미 헨드릭스는 42년 11월 27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11세 때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만지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에 전기기타를 갖게 되었다. 14세가 될 무렵에는 시애틀 지역의 여러 밴드에서 연주 활동을 하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하는데 거기서 베이시스트인 빌리 콕스를 만난다.

낙하산 훈련 중에 등부상을 당해 제대한 그는 비비 킹, 샘 쿡, 재키 윌슨 등의 아티스트들의 반주자로 남부지방에서 공연활동을 하기도 하고 리틀 리챠드, 아이크 앤드 티나 터너와도 함께 연주를 하다가 64년에는 뉴욕으로 이주, 아일리 브라더스와 킹 커티스를 지원하였고, 커티스 나이트와 로니 영블러드와 함께 녹음을 하기도 했다.

65년에는 지미 제임스와 블루 플레임즈를 결성하고 그리니치 빌리지 지역에서 활동하다 66년 9월에 영국으로 건너가 기타리스트에서 베이시스트로 전향한 노엘 레딩과 함께 지미 핸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결성한다. 크림(Cream)과 같은 트리오 형태를 갖춘 이들은 곧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Hey Joe', 'Purple Haze', 그리고 'The Wind Cries Mary' 등의 주요 싱글들을 67년초에 발표한다.

같은 해 3월말부터는 전영순회공연을 시작하였고 데뷔앨범인 [Are You Experienced]을 발매한다. 6월에 헨드릭스는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에 참여, 미국 무대에 데뷔하는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화려한 연주력이 빠른 속도로 전해지면서 영국에서만 발매했던 데뷔작이 동년 8월 미국에서도 발매된다. 'Purple Haze', 'Hey Joe', 'Foxy Lady' 같은 초기의 고전은 물론이고 서정적인 'The Wind Cries Mary' 등이 여기에 실려 있다. 68년 초에 발매한 [Axix: Bold As Love]에 수록되었던 'If 6 Was 9'은 후에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가 주연한 영화 [이지 라이더]의 사운드트랙에도 실리기도 한다.

이들의 마지막 작품인 [Electric Ladyland]는 일부의 평론가로부터 '방종하다'는 모욕적인 혹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더블앨범인 본작에는 'Crosstown Traffic'을 비롯해 스티브 윈우드가 올갠을 담당한 재즈 명곡 'Voodoo Child', 밥 딜런의 'All Along The Watchtow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68년 11월에 이들은 해체할 뜻을 발표하였으나, 계약상의 문제로 69년까지 그룹이 지속되었다. 그룹을 해체하던 69년 노엘 레딩은 새로운 밴드 팻 매트리스를 결성하고 71년에는 로우드를, 73년에는 노엘 레딩 밴드를 결성하였다. 헨드릭스가 죽기 직전까지 간간히 연주를 같이 했던 드러머 미치 미첼은 72년 래머탐의 멤버가 되었다.

69년 지미는 자신의 스튜디오인 일렉트릭 레이디랜드를 설립한 이후 대중들 앞에서의 연주를 삼가하며 존 맥로린과 같은 전위파 재즈 연주가들과 함께 스튜디오 테입을 제작하는데 무려 800여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동년 8월 미치 미첼과 빌리 콕스의 지원을 받으며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한 그는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문제작 'The Star Spangled Banner'를 연주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이 라이브 공연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실황앨범인 [Woodstock]을 통해 들을 수 있다.

70년을 맞이하며 헨드릭스는 빌리 콕스와 버디 마일즈로 구성된 초호화 밴드인 밴드 오브 집시즈를 결성해 필모어 이스트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고 후에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가 앨범으로 제작되어 발매 된다.

70년 봄과 여름에 밴드 오브 집시즈의 순회공연을 가지고 일렉트릭 레이디랜드를 설립한 직후인 8월에는 와이트 섬에서 개최된 페스티벌에도 출연한다. 그러나 9월 18일, 바르비투르 산염 숙취에 기인한 토제 흡입으로 말미암아 그는 27년이라는 찬란했지만 짧은 생을 런던에서 마감하고 만다. 그의 사후에 발매된 [The Cry of Love]에는 버디 마일즈의 'Eazy Rider'와 노엘 레딩의 'My Friend'를 비롯해 슬로우 템포의 블루스 걸작인 'Drifting'과 'Angel' 등이 수록돼 있다.

글 /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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