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 Clapton (에릭 클랩튼)

“프레디 킹에서 시작하여 B.B.킹으로 이어지는 스타일들을 익히며 내 연주를 다듬어왔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들의 체취가 내 연주에서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릭 클랩튼은 1944년 3월 30일 영국 서리주 리플리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 받아 기타를 시작한 그는 척 베리, 보 디들리,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 로버트 존슨, 스킵 제임스 등을 들으며 기타를 익혔다.

그는 한때 킹스턴 아트 스쿨에 다니면서 디자이너를 꿈꾸었으나 기타가 더 재미있어 63년 9월 루스터스(Roosters)에 가입하였다. 그후 케이시 존스&더 엔지니어즈(CaseyJones&The Engineers)를 거쳐 야드버즈에 가입해 약 1년반 정도 활동하다 존 메이욜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에 가입해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66년 7월에는 슈퍼 록트리오 크림(Cream)을 결성해 'Sunshine On Your Love', 'White Room', 'Spoonful' 등 많은 명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크림도 오래가지 못하고 68년 11월 앨버트 홀에서의 고별공연을 끝으로 해산하고 만다.

이후 그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등과 함께 블라인드 페이쓰(Blind Faith)를 결성해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을 발표하고 록 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지만 이 그룹도 얼마가지 못해 해산되었다. 블라인드 페이쓰 후에도 델라니&보니, 레온 러셀, 스티브 스틸스, 조지 해리슨 등과 함께 음악을 하다가 70년 데렉 &더 도미노(Derek & The Dominos)를 조직해 [Layla & The Other Assorted Love Songs]라는 명반을 발표했다. 특히 이 앨범에는 듀언 올맨 등이 함께 해 에릭 클랩튼과 트윈 슬라이드 기타 연주를 들려주어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러나 72년에 밴드는 해체되고 이후부터 그는 약물 중독으로 침체기를 보내다가 놀라운 의지력으로 다시 음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74년 [461 Ocean Boulevard]란 앨범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계속해서 그는 여러 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했다. 'Lay Down Sally', 'Wonderful Tonight' 등은 당시 그의 인기를 대변해주는 곡들이다. 81년 3월엔 [Another Ticket]이 빅 히트를 장식하고, 85년에는 드럼의 필 콜린스와 제프 포카로, 베이스의 네이던 이스트와 도널드 “덕” 던, 기타의 스티브 루카서 등을 초빙해 [Behind The Sun]을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편 88년에는 에릭 클랩튼의 역사를 집대성한 6장 짜리 앨범 [Crossroads]를 공개했고 90년대로 들어와선 언플러그드 사운드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켜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음악을 빌보드차트 등 유명 히트차트에서 맹위를 떨치게 했다. 그리고 'Tears In Heaven' 등과 같은 감미롭고 서정적이며 편안한 멜로디가 담긴 노래들을 발표해 인기 최정상의 아티스트로서 군림하고 있다.

에릭 클랩튼은 우선 피킹의 액센트 조절이 뛰어나다. 곡의 성격에 따라 멜로디에 힘을 넣는 방법이 각기 다른데, 이 피킹 조절이야말로 그만의 빼어난 리듬감과 특유의 그루브를 창출하는 핵이 되고 있다. 거기에 그의 핑거링은 부드럽고 자연스런 포지션 이동을 통해 섬세하며 아름다운 음을 배열해 간다. 이것은 그의 능란한 초킹과 해머링, 풀링, 슬라이드의 효과적인 쓰임에 의한 것이랄 수 있다. 'Why Does Love To Be So Sad', 'Deserted Cities Of The Heart', 'Double Trouble', 'Lay Down Sally'-이 곡은 특히 초킹의 쓰임을 주목해서 들어보라-등이 그 대표적이며 와와 프레이즈에 의한 다양한 바리에이션 솔로도 'White Room', 'Tales Of Brave Ulysses', 'Presence Of The Lord'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이외에 부드러운 멜로디와 음정의 정확함이 돋보이는 다채로운 벤딩 프레이즈와 런주법도 그의 장기인데, 이후 이러한 주법은 70년대의 하드록 기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Do What You Like'에서의 도리안 스케일에 기반한 색다른 솔로처럼 실험적인 테마 전개에도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어쨌든 ‘에릭 클랩튼’이라는 이름은 그 부드럽고 정확한 피킹이 만들어내는 포근하고 화사한 톤과, 노래하는 듯 자연스런 라인, 그리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리듬 등으로 록기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로서 기억될 것이다.

(글 / 조성진)



60년대 지미 헨드릭스(Jimmy Hendrix)와 더불어 최고의 록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살아있는 전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은 당대 영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구가했던 블루스 그룹 야드버즈(Yardbirds), 존 메이욜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즈(John Mayall and the Bluesbreakers), 사이키델릭 블루스 록 그룹 크림(Cream)등에서 발군의 연주 실력을 발휘해 왔고,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존경받는 최고의 뮤지션이다.

14살 생일에 조부모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유명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의 주법을 답습하면서 역량을 키워간 에릭은, 이후 대학을 자퇴하고 지역 클럽이나 선술집에서 연주하며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모색한다.

한때 로컬 R&B 밴드인 루스터(Rooster)에서 연주생활을 하던 그는 63년 R&B/록 밴드인 야드버즈에 참여하여 두 장의 성공적인 앨범 [Five live Yardbirds](64), [For Your Love](65)를 발매한 후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그룹을 탈퇴한다. 이후 존 메이욜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즈에 조인한 에릭은 이 그룹에서 슬로우핸드(slowhand)라는 애칭을 얻고 기타 연주에 있어 신과 같다라는 격찬을 들으면서 이미 영국 블루스계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메이욜을 능가하게 되었고, 그룹이 데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66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으로 UK 차트 6위에 올랐지만 메이욜의 주도적인 행동에 실망한 그는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함께 그룹을 탈퇴, 새로운 블루스 록 그룹인 크림을 결성한다.  재능있는 뮤지션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이들은 결성 당시 이미 열성팬들을 확보하였으며, [Fresh Cream](66) 발매 이후 미국 순회공연을 가지면서 즉흥 연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Disraeli Gears and Wheel of Fire]의 'White Room', 'Sunshine of Your Love' 같은 라디오 히트곡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플래티넘을 기록한 크림은 에릭과 잭 사이에 음악적인 갈등이 불거지면서 68년 결국 해체를 선언, 당대 최고로 영향력 있던 이 그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에릭은 곧 진저와 릭 그레치(Rick Grech, 베이스),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키보드)와 함께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결성해 69년 6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공식 데뷔한다. 이어 발표한 셀프타이틀의 데뷔 앨범이 빅 히트를 기록하고 매진 사태를 빚을 정도로 성공적인 미국 순회공연을 마쳤지만, 이들은 구성원간의 음악적 성향의 충돌로 해체하게 된다.

한동안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에릭은 69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존 레논(John Lennon)의 자선공연에 참여하여 그의 우노 밴드에서 연주생활을 하게 된다. 70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표, 'After Midnight'로 인기를 모으며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각광받았지만, 솔로 주자로 활동하기를 주저한 에릭은 친구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All Things Must Pass] 앨범 작업을 돕는다.  그러나 조지의 부인인 패티(Patti)와 사랑에 빠지면서 에릭은 마약을 시작하게 되고, 한동안 음악과 담을 쌓은 채 약물중독으로 침체기에 빠진다.

72년 여러 밴드 시절의 히트곡을 모은 [The History of Eric Clapton]으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게 된 에릭은 73년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 컴백 공연을 갖고 라이브 실황 앨범 [Eric Clapton's Rainbow Concert]를 발매한다. 74년 [461 Ocean Boulevard]를 발표, 넘버원 싱글 'I Shot the Sheriff'로 기타 연주가 아닌 자신의 보컬을 앞세우게 된 그는 [There's One in Every Crowd](75), [No Reason to Cry](76), [Slowhand](77), [Backless](77)를 발표하며 꾸준히 차트를 점유함으로써 그 명성을 공고히 했다.

81년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맺은 그는 83년 블루스 성향의 [Money and Cigarettes]를 발매한 후 전문 프로듀서와 작곡가, 백 밴드 등의 참여로 이루어진 앨범 [Behind the Sun](85)으로 히트를 거둔다. 86년 8월 이탈리아 출신 모델과의 사이에서 첫 아들 코너(Connor)가 출생하자 그는 필 콜린스(Phil Collins)와 타니 터너(Tina Turner)로부터 받은 곡들이 수록된 [August]를 발매한다.

89년 [Journeyman]으로 자신의 초창기 블루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스타일을 구사하며 활발한 활동을 재기한 에릭은 91년 사랑하는 아들이 아파트에서 추락사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92년 영화 [Rush]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맡게 된 에릭은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곡 'Tears in Heaven'을 발표했고, MTV 언플러그드에 모습을 드러내어 'Tears in Heaven'을 부르며 많은 팝 팬들에게 감정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뒤이어 발매된 [Unplugged](92)는 그에게 6개의 그래미상을 안겨주었고, 96년까지 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때 주춤했던 스타덤을 다시 회복한 에릭은 94년 그가 오랫동안 녹음하고 싶어한 블루스 스탠다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 [From the Cradle]을 제작, 4개의 그래미상을 획득한다.

96년 베이비페이스(Babyface)가 작곡한 영화 [Phenomenon]의 사운드트랙을 불러 또 하나의 그래미상을 추가한 에릭은 97년 프로듀서이자 키보디스트인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와 뉴 에이지/트립합(trip-hop) 듀오를 결성했고, 엑스 샘플(X-sample)이라는 가명으로 테크노 앨범 [Retail Therapy]를 발표한다.

98년 [Pilgrim]을 발표하여 'My Father's Eyes'로 차트 10위권 안에 진입함으로써 식지 않은 인기를 확인한 에릭 클랩튼은 35년 이상 최고의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로, AOR(Adult-Oriented Rock) 주자로 뛰어난 테크닉과 연주 솜씨를 발휘하며 롱런을 구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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