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날의 초상 ]
조회 수 : 4605
2007.03.09 (13:46:43)
아버지 어깨를 펴게 합시다.
경제력 있어도 경제권 없고, 자녀 교육엔 발언권 잃어 …
미국도 50년 전 `아버지 권위 추락` 사회문제
기업·사회 가족 친화적으로 바뀌며 해결 노력
최근 동창 모임에 다녀온 주부 박영자(58)씨. 친구들한테 '웃기는' 이야기를 실컷 들었다.
"나이 먹은 여자한테 꼭 필요한 네 가지가 뭔지 아니? 첫째가 건강, 둘째가 돈, 셋째가 친구, 넷째가 딸이란다." "그럼 가장 필요 없는 한 가지는? 바로 남편! 귀찮기만 하지 쓸 데가 없잖아." "맞아. 그래서 요즘 안 쓰는 물건 내다놓으라고 하면 늙은 남편 내놓는단다."
폭소가 터진 뒤 비슷한 얘기가 줄을 이었다. 요즘 남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내가 해외여행 가자는 것과 이사 가자는 것이란다. 외국 나가서 버리고 올까봐, 이사 갈 때 안 데리고 갈까봐 겁이 나서란다. "그래서 요즘 남편들 이사 갈 때 따라가려면 강아지라도 안고 있어야 한다잖니."
#의사결정권을 잃다
아버지의 권력 상실 시대다. 한때 헛기침 소리만으로도 집안을 긴장시켰던 절대권력자가 이제는 우스개거리로 전락했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 퇴직 붐과 맞물려 불거졌던 '고개 숙인 아버지' 현상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제는 돈을 버는 가장까지 의사결정권을 잃었다. 이사와 재테크 등 집안 대소사를 모두 아내가 결정한다. 경제력은 있어도 경제권은 없는 셈이다. 아이들 교육 문제에 들어가면 발언권마저 잃는다. 복잡한 입시제도, 사교육 광풍 때문이다. 동네 아줌마 모임이며 학원 입시설명회 등에서 온갖 소식을 듣고 오는 아내와 '정보력'에서 상대가 안 된다. 모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연봉 7000만원인 김진철(43)씨의 한 달 용돈은 15만원이다. 월급통장은 전업주부인 아내가 관리한다. "집 살 때 진 빚 갚아가며 초.중학생 남매 사교육비 대려면 돈이 없다"는 아내의 주장에 김씨도 동의했다. 하지만 부모님 용돈 한번, 친구들 술 한번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도 돈 쓸 일이 있으면 아내만 찾는다.
대기업 중역 박창범(50)씨는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아내가 자신과 의논도 하지 않고 아이들의 조기 유학을 결정한 뒤 기러기 가족이 되자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집안일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된 데는 고부갈등이 한몫했다. 박씨가 보기에도 박씨 어머니의 구박과 트집이 도를 넘었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평소 집안일은 모두 아내 결정에 따랐다. 20여 년을 그렇게 살고 나니 이젠 박씨의 의견을 묻지도 않게 된 것이다. 박씨는 "'그동안 나는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작은 일에도 자꾸 화가 난다"고 하소연했다.
퇴직 이후 가장의 형편은 더 딱하다. 한국남성의전화 이옥이 소장은 "퇴직금 관리를 아내에게 모두 맡겼는데 아내가 용돈을 주지 않아 고민하는 남성도 많다"고 밝혔다.
#왕따. 자초했나, 떼밀렸나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정서적으로도 소외된다. 아이들은 엄마와 똘똘 뭉쳐 한편이다.
결혼 13년차인 직장인 허정식(42)씨. 휴일 아침 일어나보면 빈집에 혼자 남겨진 경우가 다반사다. 아내가 아이들만 데리고 영화도 보고 당일치기 여행도 가는 것이다. 처음엔 회사일 때문이었다. 휴일에도 회사 갈 일이 많았다. 모처럼 쉴 때는 자고 싶어 "난 못 간다"고 했다. 이젠 제안도 못 받는 처지다. 허씨는 "혼자 집에서 라면으로 식사 때우며 TV 보고 인터넷 하다 보면 폐인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퇴직 공무원 한성진(62)씨는 "나는 집에서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라고 한탄한다.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가 강아지에게는 "밥 먹었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에게는 말 한마디 없다는 것이다. 한씨는 엄한 가장이었다. 아이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무조건 명령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대화 단절. 한씨는 "부양 책임을 다했으니 존경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알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 왕따 현상은 가해자.피해자를 가리기 힘들다. 원죄가 있다면 결혼기념일이어도, 아이 생일이어도 회식은 거절할 수 없었던 직장 문화에 있다. 아버지는 바깥일에 몸 바쳐 살고, 남은 가족들은 싫지만 적응한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아버지가 끼면 어색하고 불편한 가족이 돼 버린다.
아버지에게 40대 후반~50대 초반의 시기는 사회 생활에 승패가 갈리는 시기. 많은 아버지가 좌절감을 경험한다.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비로소 가족을 돌아보니 아이들은 마침 사춘기다. "아빠 들어오는데 인사도 안 하느냐"로 시작된 잔소리가 "애들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로 이어지고, 끝은 "당신은 애들 클 때 뭐했는데"라는 아내의 반격이 돌아온다. 이 단계에서 자칫하다간 '패륜가장'이 되기 십상이다. 결국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부부클리닉 후 김병후 원장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서 가장이 밖에서 돈 벌어오는 것만으로는 가족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며 "미국에서도 50년 전 아버지 권위 추락 문제가 불거진 뒤 기업.사회 분위기가 가족 친화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지영.김영훈 기자 [jylee@joongang.co.kr]
경제력 있어도 경제권 없고, 자녀 교육엔 발언권 잃어 …
미국도 50년 전 `아버지 권위 추락` 사회문제
기업·사회 가족 친화적으로 바뀌며 해결 노력
최근 동창 모임에 다녀온 주부 박영자(58)씨. 친구들한테 '웃기는' 이야기를 실컷 들었다.
"나이 먹은 여자한테 꼭 필요한 네 가지가 뭔지 아니? 첫째가 건강, 둘째가 돈, 셋째가 친구, 넷째가 딸이란다." "그럼 가장 필요 없는 한 가지는? 바로 남편! 귀찮기만 하지 쓸 데가 없잖아." "맞아. 그래서 요즘 안 쓰는 물건 내다놓으라고 하면 늙은 남편 내놓는단다."
폭소가 터진 뒤 비슷한 얘기가 줄을 이었다. 요즘 남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내가 해외여행 가자는 것과 이사 가자는 것이란다. 외국 나가서 버리고 올까봐, 이사 갈 때 안 데리고 갈까봐 겁이 나서란다. "그래서 요즘 남편들 이사 갈 때 따라가려면 강아지라도 안고 있어야 한다잖니."
#의사결정권을 잃다
아버지의 권력 상실 시대다. 한때 헛기침 소리만으로도 집안을 긴장시켰던 절대권력자가 이제는 우스개거리로 전락했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 퇴직 붐과 맞물려 불거졌던 '고개 숙인 아버지' 현상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제는 돈을 버는 가장까지 의사결정권을 잃었다. 이사와 재테크 등 집안 대소사를 모두 아내가 결정한다. 경제력은 있어도 경제권은 없는 셈이다. 아이들 교육 문제에 들어가면 발언권마저 잃는다. 복잡한 입시제도, 사교육 광풍 때문이다. 동네 아줌마 모임이며 학원 입시설명회 등에서 온갖 소식을 듣고 오는 아내와 '정보력'에서 상대가 안 된다. 모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연봉 7000만원인 김진철(43)씨의 한 달 용돈은 15만원이다. 월급통장은 전업주부인 아내가 관리한다. "집 살 때 진 빚 갚아가며 초.중학생 남매 사교육비 대려면 돈이 없다"는 아내의 주장에 김씨도 동의했다. 하지만 부모님 용돈 한번, 친구들 술 한번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도 돈 쓸 일이 있으면 아내만 찾는다.
대기업 중역 박창범(50)씨는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아내가 자신과 의논도 하지 않고 아이들의 조기 유학을 결정한 뒤 기러기 가족이 되자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집안일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된 데는 고부갈등이 한몫했다. 박씨가 보기에도 박씨 어머니의 구박과 트집이 도를 넘었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평소 집안일은 모두 아내 결정에 따랐다. 20여 년을 그렇게 살고 나니 이젠 박씨의 의견을 묻지도 않게 된 것이다. 박씨는 "'그동안 나는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작은 일에도 자꾸 화가 난다"고 하소연했다.
퇴직 이후 가장의 형편은 더 딱하다. 한국남성의전화 이옥이 소장은 "퇴직금 관리를 아내에게 모두 맡겼는데 아내가 용돈을 주지 않아 고민하는 남성도 많다"고 밝혔다.
#왕따. 자초했나, 떼밀렸나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정서적으로도 소외된다. 아이들은 엄마와 똘똘 뭉쳐 한편이다.
결혼 13년차인 직장인 허정식(42)씨. 휴일 아침 일어나보면 빈집에 혼자 남겨진 경우가 다반사다. 아내가 아이들만 데리고 영화도 보고 당일치기 여행도 가는 것이다. 처음엔 회사일 때문이었다. 휴일에도 회사 갈 일이 많았다. 모처럼 쉴 때는 자고 싶어 "난 못 간다"고 했다. 이젠 제안도 못 받는 처지다. 허씨는 "혼자 집에서 라면으로 식사 때우며 TV 보고 인터넷 하다 보면 폐인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퇴직 공무원 한성진(62)씨는 "나는 집에서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라고 한탄한다.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가 강아지에게는 "밥 먹었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에게는 말 한마디 없다는 것이다. 한씨는 엄한 가장이었다. 아이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무조건 명령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대화 단절. 한씨는 "부양 책임을 다했으니 존경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알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 왕따 현상은 가해자.피해자를 가리기 힘들다. 원죄가 있다면 결혼기념일이어도, 아이 생일이어도 회식은 거절할 수 없었던 직장 문화에 있다. 아버지는 바깥일에 몸 바쳐 살고, 남은 가족들은 싫지만 적응한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아버지가 끼면 어색하고 불편한 가족이 돼 버린다.
아버지에게 40대 후반~50대 초반의 시기는 사회 생활에 승패가 갈리는 시기. 많은 아버지가 좌절감을 경험한다.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비로소 가족을 돌아보니 아이들은 마침 사춘기다. "아빠 들어오는데 인사도 안 하느냐"로 시작된 잔소리가 "애들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로 이어지고, 끝은 "당신은 애들 클 때 뭐했는데"라는 아내의 반격이 돌아온다. 이 단계에서 자칫하다간 '패륜가장'이 되기 십상이다. 결국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부부클리닉 후 김병후 원장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서 가장이 밖에서 돈 벌어오는 것만으로는 가족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며 "미국에서도 50년 전 아버지 권위 추락 문제가 불거진 뒤 기업.사회 분위기가 가족 친화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지영.김영훈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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