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두 노인이 있었다. 두 노인은 오랜 친구로서, 한 노인은 몹시 가난하고 한 노인은 몹시 부유했다. 거의 일생 동안 우정을 나누다시피한 두 노인은, 어느 때부터인가 매달 보름날이면 만나 술 한 잔씩 나누는 버릇이 생겼다.

"여보게 만불이, 이번 보름달은 유난히 밝고 커보이지 않는가?"

"마음이 넓으면 달이 커보인다는데, 이 사람 짝쇠, 사람이 뭔가 달라진 구석이 있는 모양일세. 그보다는 오늘은 달이 세 개나 되는구먼."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보게나, 하늘에 보름달이 하나, 그리고 우리들의 술잔에도 보름달이 각각 하나씩 떠 있으니 합해서 셋 아닌가?"

"이사람 만불이, 자네 사는 형편이 넉넉하다보니, 제법 풍류까지 늘었네그려. 그런데...."

여기서 짝쇠 노인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던 말을 이었다.

"여보게,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네만, 옛날엔 우리 둘의 살림살이가 서로 엇비슷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사는 게 이렇게 고달프게 되고, 자네는 전보다 훨씬 더 넉넉하게 되었나?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씀씀이가 헤픈 편이 아닌데 말일세."

그러자, 만불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떼었다.

"암, 그렇고말고. 자네는 헤프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지."

"그런데 어째서 난 사는 게 요모양 요꼴이 되었냐 그 말일세."

"거기에는 다 까닭이 있다네."

"까닭이 있다고? 무슨 까닭? 자네가 나보다 더 여물고 부지런하다 그 말인가?"

"아니지, 자네나 나나 다같이 헤프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지."

"그렇다면 무슨 까닭이 있다는 건가/"

"들어보게나. 재물이란 꼭 부지런하고 안 쓴다고 해서 늘어나는 게 아닐세. 무릇 재물이란, 그 집이 화목하고 자식들이 부모께 효성스러워야 모이는 법일세. 왜 화목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집안에 화목이 있어야 웃음이 있고, 웃음이 있어야 늘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거 아닌가? 내가 보건대 자네 집안은 일 년 내내 큰 일, 작은 일로 아웅다웅하던데, 그래가지고서야 무슨 일에 능률이 있겠나. 그러다보니 한 해, 두 해 가는 동안에 서서히 살림이 쪼그라들어 지금과 같이 된 것일세. 자, 그렇다면 화목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그건 짙은 효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네. 내가 돌아가신 내 아버님께 효성을 다하니까 자식이 그 본을 따서 또 내게 효성을 다하여, 우리 집안이 화목하게 된 것일세. 그러다보니 서서히 사는 형편이 펴지더라니까."

만불 노인의 말에 짝쇠 노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흥, 자네는 우리 집안을 화목, 효성 따위는 쥐똥 만큼도 없는 콩가루 집안으로 보지만, 자네 집안과 비교하여 별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짝쇠, 자네 진정으로 하는 이야긴가?"

"진정이고 말고."

"그래? 그럼 자네 가족들은 자네가 시키는 일이라면 아무리 무리한 일이라고 불평 않고 복종을 하나?"

"암, 두 번 말하면 입만 아프지."

"글세....."

"여보게, 너무 젠체하지 말게. 미덥지 못하면 내기를 하세."

"내기를 하자고? 오래 살다 보니 별난 내기 다 하자네. 좋으이. 그러게 함세. 그럼 내가 먼저 하지. 짝쇠, 우리 집으로 가세."

집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만불 노인은, 별로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큰아들을 불렀다. 그러자 광에서 흙일을 하고 있던 아들이 '네'하고 대답한 후, 우물가로 가서 손을씻더니 냉큼 달려와 공손히 절을 한 뒤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오냐, 내가 너를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지금 곧 식구들을 불러모아, 저 외양간의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려라."

'예,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큰아들은 방마다 돌아다니며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우를 불러내더니 방금 전에 아버지가 한 말을 전했다. 그러자 온 집안 식구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큰아들이 외양간으로 가 소를 끌어내나 어머니와 아내는 머슴과 함께 짚단을 가져왔고, 작은아들은 광에서 사닥다리를 내왔다. 작은아들이 그 사닥다리를 지붕에 걸쳐 놓자, 일동이 달려들어 그 위에 짚단을 깔았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 일이 끝나자, 큰아들이 사닥다리 위의 짚단을 밟으며 소를 몰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누가 들어도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지시였건만, 그 가족은 단합하여 척척 해내었던 것이다.

"이 사람 짝쇠, 보았지? 자네 가족도 이렇게 할 수 있다 그 말인가?"

짝쇠 노인은 별로 시덥지 않다는 얼굴도 받았다.

"글쎄, 너무 젠체하지 말래두. 그럼 이번에는 내 집으로 가세."

짝쇠 노인 역시 마당에 들어서자 마자,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자식을 불렀다. 뒷짐을 진 채 한동안 마당을 어슬렁거려도 아무 기척이 없자 짝쇠 노인은 혼잣말로,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 얘들이 못들었나?"

하더니, 이번에는 목에 힘줄을 세우며 큰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그제야 건넌방문이 여리면서, 낮잠을 잔 것이 분명한 표정인 그 집 큰아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짝쇠 노인은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아, 일이 났던 불이 났던 아비가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고 냉큼 달려올 일이지, 어디서 긴 하품이냐?"

만불 노인이 민망하여 짝쇠 노인의 귀에 대고,

"여보게, 더 볼 거 없네. 나는 그만 돌아가겠네."

이렇게 소곤거리자, 짝쇠 노인은 벌컥 역정을 내며 가시 돋친 한마디를 했다.

"여보게, 일껏 곤하게 자는 아들 깨워 놓으니까 다음은 안 보겠다는 건가? 그리고 우리 집 자식은 자네 집 자식에 비하면 발바닥에도 차지 않는다고 소문을 내려고?"

만불 노인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계속 하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짝쇠 노인이 앞에 대령해 있는 아들을 보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식구들 나오라고 하여, 외양간의 소를 저 지붕 위로 끌어 올려라."

아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버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소를 저 지붕 위로 끌어 올리라고 하셨던가요?"

"이 녀석아,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다 옮기면서 뭘 미처 못들은 척하느냐?"

그러자 아들이 퉁명스럽게 받았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럽니다, 왜요?"

"어허, 이런 경을 칠 녀석이 있나. 아비가 시키면 국으로 할 일이지. 웬 말이 그렇게 많으냐?"

짝쇠 노인의 벌겋게 단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아들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방 쪽으로 갔다.

"어머니, 여기 좀 내다보세요. 아버지가 이상해졌어요."

안방 쪽문이 열리면서 짝쇠 노인의 아내가 얼굴을 내보였다.

"아버지가 이상해졌다니, 그게 웬말이냐? 못먹을 거라도 잡수신 모양이지?"

"외양간 소를 지붕 위로 끌어 올리라니, 그게 성한 말입니까?"

"뭐라고?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리라고 하신다고? 네가 잘못 들었겠지. 그게 정말이라면 갑자기 실성을 하셨거나 노망하신 게 틀림없다."

그러자 부엌에서 며느리가 나오면서, 저도 입이 있다는 듯 한 마디 거들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그게 정말이라면 노망하셔도 제대로 노망을 하신 거지요."

짝쇠 노인이 기가 차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만불 노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은근히 말했다.

"보시게, 이건 화목이 아닐세. 그러나 실망하지는 말게, 앞으로 가르치면 되니까."



- 소년소녀 삼강오륜, 배영기 편저 / 김동리 추천,(민서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