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터섬의 석상 (칠레)
원지어(原地語)로는 라파누이(Rapa Nui), 에스파냐어로는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한다. 네덜란드 탐험가인 J.로게벤이 1722년 부활절(Easter day)에 상륙한 데서 이스터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개 가까운 화구가 있는 화산섬으로서 거의 삼각형이다. 토지의 대부분은 칠레 정부가 소유하며, 양과 소의 방목에 이용되고 있다. 수목은 없고 초원이며, 물은 적은 편이다.

고고학상 중요한 섬으로서, 인면석상(人面石像) 등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적과 폴리네시아 유일의 문자가 남겨져 있으나, 이것들을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다. 이 섬으로의 이주는 10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언어·인류학상으로 보아 최초의 주민은 멜라네시아의 피가 섞인 폴리네시아인으로 본다. 1722년 이전에는 최고 4,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862년의 노예사냥과, 그에 잇달은 천연두의 유행 등으로 섬의 인구는 최저 111명까지 감소되었다. 1864년 이후에 백인도 정착하게 되고 1888년에 칠레령이 되었다.

현재 서해안의 약 20㎢의 토지는 원주민(토민)들의 보호지로 되어 있다. 가장 주요한 유적은 아후라고 하는 돌로 쌓은 대좌(臺座)와 인면석상이다. 아후는 260여 개가 있으며,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바다가 보이는 절벽 등, 해안을 따라 축조되어 있고, 단속적으로 섬을 일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전형적인 아후 하나는 길이 45m, 너비 2.7m, 높이 2.4m에 달하는 것으로서 최대 6t의 돌로 쌓아 만들어졌다. 아후는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성스러운 장소였다고 생각된다.

이스터섬의 상징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면석상은 약 550개 있으며, 높이 1~30m에 이르는 거대한 것으로서, 대개는 해안을 따라 놓여졌고, 원래는 아후 위에 세워졌던 경우가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치밀한 응회암(凝灰岩)으로 만들어진 긴 귀, 뚫려 있는 코를 가진 머리와 어깨만의 상으로서, 디자인은 모두가 거의 비슷하다. 이전에는 머리에 크고 늙은 장식의 돌을 얹어 놓은 것이 많았으나 지금은 무너져 있다. 인면석상은 라노라라크라는 화산에서 잘라내어 운반된 것으로 채석장 옆으로 뚫린 굴 속에는 지금도 돌을 떠내다만 상(像)이 남아 있다.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인면석상은 옆으로 눕힌 형으로 조각되어 최후에 등 부분이 잘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섬에는 그 밖에도 석기나, 폴리네시아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돌만으로 지은 집, 아름다운 그림문자를 새긴 목판 등이 발견되었다.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이 거석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은 원주민과 다른 페루에서 온 인종일 것이라는 설을 세워 《아쿠아쿠》라는 책을 펴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러한 거석상 제작에 필요한 목재나 로프로 쓸 만한 재료는 물론 돌을 운반할 동물도 없었기 때문에 섬 주민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위에 많은 거석상들이 쓰러져 있는 이유도 불가사의하였다. 이를 밝히려는 고고학 및 고생물학의 연구 조사 결과 최초의 원주민이 거주한 연대는 400~700년으로 나타났으며, 거석상은 1200~1500년에 조각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원주민의 숫자는 7천 명~2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운반에 필요한 목재에 관한 연구는 화분(花粉) 분석을 통하여 해결되었다. 늪지나 못의 바닥에서 수직으로 잘라낸 잔해물층에 있는 수천 가지의 화분을 일일이 분석한 결과 이 섬에는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30만 년 이전부터 아열대수림이 우거졌음이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칠레산 와인 야자수 화분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직경 6피트에 높이 82피트나 되는 이 야자수는 거석상을 운반하거나 카누를 만드는 데 안성맞춤의 목재이다. 주민들은 이 야자수로 만든 대형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래를 포획하였음이 돌고래뼈 화석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 밖에 올빼미·왜가리·앵무새·뜸부기 등 6가지 조류와 들쥐의 화석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들 화석과 함께 화분층에서 숯덩이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아열대수림에 대화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가한 인구로 많은 나무가 벌채되고, 야자수는 1400년경에는 사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숲이 사라짐에 따라 토양도 황폐해져,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종족간의 분규가 일어났으며, 그들은 경쟁 상대 부족의 거석상을 쓰러뜨리거나 거석상의 머리를 부수는 방법으로 증오심을 표현하였다. 현재 칠레 정부의 의뢰로 유네스코가 유적보존에 나서고 있다.

■ 스톤헨지 (영국)
영국 윌트셔주(州) 솔즈베리평원에 있는 고대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로 거석주(巨石柱)라고도 한다. 영국의 에브벨리, 프랑스의 엘라니크의 것과 더불어 장대한 규모의 스톤서클(環狀列石)의 유구(遺構)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름 114m의 도랑과 도랑 안쪽에 만들어진 제방에 둘러싸여 2중의 고리 모양으로 세워진 82개의 입석(立石)의 뽑힌 자리가 보인다. 중심부에는 2중으로 환상열석과 말발굽 모양의 열석이 둘러쳐 있다. 바깥쪽의 환상열석은 지름이 30m인데 30개의 열석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 순석(楯石)을 난간처럼 걸쳐 놓았으며 지름 23m의 안쪽 열석에는 순석은 없다.

다시 안쪽에는 두 개의 입석 위에 횡석(橫石)을 놓은 5쌍의 삼석탑이 중앙의 제단석(祭壇石)으로 불리는 네모난 돌을 에워싸듯 놓여 있다. 이 석조구축물의 주축이라고 할 동북부에는 바깔 도랑이 잘리어 4각형의 광장이 부설되었고, 그 중간에 힐스톤이라고 불리는 1개의 돌이 있다.

이 구축물들은 건조시기가 각각 다른데 바깥 도랑과 제방 그리고 힐스톤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 BC 1848±275년에 건조되었고, 입석류는 BC 1700∼BC 1600년, 중앙의 석조물은 BC 1500∼BC 1400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스톤헨지가 고대의 태양신앙과 결부되고, 하지(夏至)의 태양이 힐스톤 위에서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추었던 시기가 천문학적으로 BC 1840±200년이라고 계산됨으로써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결과와 일치하는 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1986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 카르나크 열석 (Ccarnac)



■ 마추피추 (페루)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 마추픽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인들의 공격을 피해 산 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
또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도시의 총면적은 5㎢, 그 절반에 해당하는 비탈면은 계단식 밭이다. 서쪽의 시가지에는 신전과 궁전, 주민 거 주지 구역이고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쌌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곳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다. 그 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했다.

마추픽추의 시공간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그 유적에는 3대의 시간이 흐른다. 200톤이 넘는 거석, 정교한 다면체로 쌓아올린 ‘태양의 신전’, 주신전 등은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작품이다. 후대의 잉카인들도 고대인들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기술로 고유의 건조물을 세웠고, 유적 붕괴 후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조잡하게나마 유적을 재건하고자 석축을 쌓았다. 이 3대에 걸친 건조물을 보노라면 문명의 영고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유적 꼭대기에 ‘인티파타나’라고 하는 제례용 석조물이 있다. 인티파타나는 ‘태양을 잇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 석조물 위에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이 솟아 있다.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매년 동지 때 이 돌기둥 바로 위에 뜬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둥을 해시계의 일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즉 이 기둥이 만드는 그림자가 시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력을 감안해 볼 때 너무 단순한 추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암반을 깎아 만들었으니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 기자의 피라미드 (이집트)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으뜸가는 기자의 피라미드.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인 고왕국 시대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에, 시간도 그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 되고 마는 인류 문명의 위대한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지구촌 최대의 석조 건축물이다.
기자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서쪽 13km 지점에 있는 역사적 유적지이다. 광활한 기자의 모래 언덕에는 3기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쿠푸왕. 카프라왕,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가 그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이 중 가장 큰 것으로 현재 높이는 137m, 처음 완공 당시 높이는 146.7m였으나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낮아진 것이다. 42층짜리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거대한 이 피라미드는 바닥면적도 무려 5만 2천㎡나 된다. 평균 2천 5백kg의 무거운 돌이 230만 개 이상 사용된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것을 건축할 때 수천 명의 석공들이 30년은 작업했다고 한다. 현지에 가서 보면 돌 한 개의 큰 크기에 놀란다. 보통 어린이 키만한 이런 돌이 실제로는 사각추이지만 멀리에서는 삼각형 모습으로 210단, 230만 개가 차곡차곡 쌓여져 137m 높이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당시 사용한 연장은 지극히 원시적인 것으로 망치·자귀\·끌과 도르레 정도로 추정되나, 전문가들은 피라미드의 정밀한 구조로 보아, 그들의 기하학적인 논리적 사고능력과 석제가공 및 양중처리 능력은 고도로 발달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떤 석회암 외벽의 돌 이음새에는 머리카락 한 올 기어들 틈이 없다고 한다. 그같이 밀폐된 공간이지만, 석관이 위치한 피라미드의 중심부의 석실은 자연 통풍이 허용되는 절묘한 설계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다는 믿음을 가졌다. 떠났던 영혼이 다시 육체로 돌아와 영원한 생이 시작되도록 미이라를 만들었다. 죽은 뒤 영생이 시작되면 쓸 수 있도록 곡식, 의류 등 많은 부장품을 묘실에 두었다. 아름다운 벽화로 묘실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왕인 파라오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부의 경사진 미로를 따라 정상에 있는 무덤 자리까지 이따금 허리를 숙여가며 올라갈 수 있는데, 이것은 국내의 종유동굴 탐사와 흡사하면서도 새롭고 충격적인 체험을 안겨준다. 하지만 최근 평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 발견되었다.

기자의 피라미드에서 약2km 떨어진 사막에서는 자그마한 피라미드들이 발견되었다. 웅장한 파라오의 피라미드에 비해 매우 작지만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벽면에 새겨진 인물상은 당시 평민들의 모습이다. 어떤 무덤에서는 6개의 계단을 가진 높이 3m의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이는 약 4700년 전 조세르왕을 위해 만든 계단식 피라미드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피라미드는 또한 세계 최대의 해시계이기도 하다. 과거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가 천문대의 기능도 겸하도록 설계했다. 이를 위해 크기, 위도, 각도 등을 정확히 계산해 건축했다. 피라미드를 통해 계절, 날짜, 시간까지도 정확히 알 수 있다.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연장 중 망치의 끝은 단단한 석록암이 사용되었다. 돌에 구멍을 뚫는 연장과 돌을 잘라내는 공구에는 부싯돌이 쓰였다. 그들이 사용한 끌은 오늘날 건축장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던 금속은 금외엔 구리가 유일한 것이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원시적인 연장은 나무·돌\·구리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지렛대, 굴림대, 경사면을 이용했으나 가축이 끄는 수레는 이용할 줄 몰랐다. 건축자재로 쓰일 돌을 얻기 위해서 커다란 암반에 먼저 구멍을 뚫고 여기에 깡마른 나무를 박고 나일강의 범람을 기다렸다. 나무가 물을 먹어 팽창해 바위가 갈라지고 물이 빠지면, 석공들은 끌과 망치 등으로 형태를 다듬었다고 한다.

평균 중량이 2.5톤, 무거운 것은 15톤이나 나가는 바위덩어리의 운반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옛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범람할 때 거대한 거룻배에 석재를 실어 피라미드 가까운 강변까지 운반했다. 그 후 자갈보도의 굴림대 위로 돌덩어리를 실은 나무썰매에 끌어 돌들을 운반했다.

카프라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높이 20m, 길이 57m이다. 얼굴은 카프라왕의 모습이고 몸은 사자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깎아 만든 스핑크스는 머리에 두건을 썼다. 이마에는 왕의 상징인 코브라가 새겨져 있다. 과거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이집트 침입시 코와 수염을 파괴해 버렸다. 밤이 되면 스핑크스 앞에서 유황과 빛의 쇼가 펼쳐진다. 조명에 의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환상적으로 비춰지면서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설명되어진다. 옛 이집트 토목건축의 보고라고 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4500년 전에 뚜렷한 연장없이 이토록 장려한 석조건축물이 지구촌에 세워진 것을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나스카의 지상 그림 (페루)
페루의 나스카 지상화는 인류 역사상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큰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그림은 1939년 비행사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약 2000년 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 속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꽃과 다른 식물들, 도마뱀, 거미 그리고 넓이가 122m나 되는 날개를 가진 콘도르 등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워낙 엄청나고 거대하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고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상화는 나스카 지역의 극도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나스카 평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연평균 강수량이 몇 십mm에 불과하여 지상화가 원래대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자갈과 흙들은 떠내려 가거나 침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선들은 주로 산화철을 함유하고 있는 자갈로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의도를 그림으로 표현해서 장기간 보존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지역만큼 적당한 곳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40년 이상 오직 나스카 지상화만 연구해 온 천문학자 마리아 라이헤 박사는 이 거대한 그림들이 천문학적인 목적을 지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그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다른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곧 페루 인들이 우주에서 온 방문객이라고 여겼던 '신들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단순한 공상이라고 말하기에는 나스카 지상화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까지도 나스카 지상화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많은 추정 이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 하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확실한 근거와 이론은 아직도 밝혀지고 있지 않고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