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오빌 깁슨(Luthier Orville H. Gibson)은 1856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1881년 그는 미시간의 칼라마주(Kalamazoo, Michigan)로 가서 신발가게 점원으로 일했다죠.  하지만 그의 음악과 기타, 그리고 만돌린 제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바이올린과 같이 곡면으로 된(carved) 디자인이 소리의 울림에 가장 좋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깁슨을 다른 기타와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죠. 하긴, 당시에는 일렉트릭 솔리드 바디가 아닌 할로우 바디의 어쿠스틱 기타와 만돌린이었으니, 바디의 울림이 더욱 중요했던거죠. 현재 깁슨의 배가 불룩한 모양은 바로 오빌 깁슨이 고안했던 것입니다.

1894년 그가 내놓은 만돌린과 기타는 바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드디어 공장을 세우게 됩니다. 사실 그가 스스로 회사를 설립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그는 이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컨설턴트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악기 디자인 이외의 경영이나 관리 업무에는 관심이 없었던거죠.

여하튼, 후에 펜더와 함께 일렉트릭 기타의 역사 그 자체가 되는 이 회사는 1902년 10월 11일 오후 2시 55분에 "Gibson Mandolin-Guitar Manufacturing Company, Limited"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회사의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컨설턴트이자 트레이너로서 일하던 오빌 깁슨은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에는 뉴욕의 세인트 로렌스 주립병원의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군요. 정신적으로 무슨 병같은게 있었는지..? 제가 가진 자료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있지 않군요.  1918년 8월 21일, 오빌 깁슨은 심장결막염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일렉트릭 기타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말이죠..
  
1935년, 깁슨에서는 드디어 일렉트릭 픽업의 개발에 착수합니다. 근 일년만인 그 해 말에 깁슨은 랩스틸기타(lap steel guitar, 하와이안 스타일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기타)에 길쭉한 육각형 형태의 픽업을 장착합니다. 똑같은 픽업이 1936년 ES-150 모델에도 쓰였다고 하는군요. 이 모델은 재즈기타리스트인 찰리 크리스찬(Charlie Christian)이 사용했고, 지금도 찰리크리스찬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948년에 테드 맥카티(Ted McCarty)가 깁슨에 입사합니다. 그는 1950년부터 1966년까지 깁슨의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실상 오늘날의 깁슨을 있게 한 장본인이죠. 맥카디가 사장으로 있던 16년간 직원 수는 10배, 이익은 15배, 판매량은 13배가 증가했습니다.  양적인 성장과 함께 맥카티 사단은 Les Paul, Byrdland, ES-335, Flying V, Explorer, SG, Firebird, 그리고 어쿠스틱 모델인 Humming Bird와 Dove, 현재까지 깁슨에 장착되는 튠오매틱(tune-o-matic), 스탑바테일피스(stop bar tailpiece), 험버킹 픽업 등을 탄생시킵니다.  

레오 펜더가 브로드캐스터(broadcaster, 후에 텔레캐스터로 이름이 바뀌는 펜더 최초의 일렉트릭 솔리드 바디 모델)를 발표하고 난 후인 1952년, 깁슨은 기타리스트인 레스폴(Les Paul)과 함께 솔리드 바디인 Gibson Les Paul 모델을 발표합니다.

이게 바로 현재 깁슨의 대표 모델인 레스폴이죠. 튠오매틱 브릿지/스탑 테일피스, 그리고 PAF(Patent Applied For, 특허출원 - 1955년 깁슨이 특허를 출원해서 59년 여름에 인가) 험버커 픽업을 장착해서 50년대에 계속 생산되었습니다. 처음엔 소프바(soap bar, 비누)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싱글 픽업을 장착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험버커가 장착되죠. 이 부분에서 아마도 경쟁사인 펜더를 의식해서 험버커를 장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기타의 톤을 펜더와 명확히 구분지어 주면서 깁슨 특유의 묵직하고 걸죽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험버커(humbucker, 잡음을 털어버린다는 뜻이죠) 픽업은 싱글픽업의 문제점이었던 노이즈를 없애면서 후에 더욱 더 왜곡된 강한 사운드를 낼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까요? 처음으로 픽업을 만들어서 할로우 바디 기타에 장착한게 1935년인데, 도대체 17년 동안이나 뭘 하다가 1952년이 되어서야 솔리드 바디에 픽업을 달아서 내놓은 것일까요? 펜더에서 브로드케스터를 발표한게 1951년이니까 바로 뒤를 이어 레스폴 모델을 발표한거죠. 그걸 보면 결코 기술력이 모자라서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깁슨은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를 그다지 쉽게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게 정답일것 같군요. 1930년대부터 연구한 솔리드 바디 기타를 1945년쯤에 레스폴이 깁슨에 들고 갔을 때 깁슨에서는 그걸 픽업달린 빗자루라고 했다는군요.
  
그런 고집스러움에 스스로 질렸는지, 아니면 펜더에게 먼저 한 방 맞은 것이 억울했는지 1950년대 말 당시 사장인 테드 맥카티(Ted Mccarthy)는 "진부함"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한다면서 Flying V 와 Explorer를 발표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대중의 취향을 10년 정도 앞질러 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죠. 당시에 이 두 모델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죠..아마도 "재수없다"는 평을 듣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만큼 너무 앞서간 디자인이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깁슨은 뒤늦은 솔리드 바디의 개발과 더불어 두 번의 실수를 한 것일까요? 뭐 경영의 측면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모델들 모두 지금은 명기로 인정받고 있으니 결국에는 "장인정신의 승리"라고 볼 수 있겠죠.

50년대 말에 기타플레이어들의 취향에 따라 깁슨은 싱글 컷어웨이 방식인 레스폴의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더블 컷어웨이인 SG를 생산합니다. 그러다가 1968년에 다시 레스폴을 생산하기 시작했죠.

1957년 깁슨은 에피폰을 인수하고 59년에 깁슨이 만드는 에피폰을 생산하기 시작해서 69년까지 계속합니다. 1970년에 생산공장을 일본으로 옮기고 그 후에 미국 밖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 에피폰이라는 상표를 달게 됩니다. 1980년에는 본사의 일부가 시카고에서 내슈빌로 이전하면서 깁슨의 메인 생산라인은 내슈빌에서 담당하고 칼라마주는 커스텀 제품만을 생산하게 됩니다. 1984년 6월을 마지막으로 칼라마주 공장은 문을 닫게 되죠. 이 때 칼라마주에 남아있던 기술자들이 모여서 헤리티지(Heritage)라는 상표를 만들고 1985년 4월에 생산을 재개합니다. 원래 깁슨을 만들던 기술자들이 만든 회사인 만큼, 헤리티지의 기타는 깁슨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회사이름부터가 "전통의 유산"이라는 뜻이잖아요?

1986년 1월, 깁슨은 5백만 달러에 매각됩니다. 그 후로 경영진은 Gibson USA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생산라인을 늘리고 제품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1991년에는 Historic Collection의 생산을 시작합니다. 빈티지 기타의 수리와 함께 빈티지 모델을 재현하고, 커스텀 제품 및 기념 모델을 만드는 것이죠. 이 제품들은 상당히 비싼 가격(!)에 깁슨이 정한 50개의 딜러샵에서만 판매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복고바람이 부는 현재의 분위기와 맞물려 일렉트릭 기타의 원조로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죠. 현재의 깁슨은 50년대 말에 익스플로러와 플라잉 V를 발표할 때와 같은 혁신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100년 간의 전통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죠. 급변하는 세계에서도 혁신보다는 그동안의 전통과 품질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기타가 단순한 공산품이 아닌 "예술"을 위한 도구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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